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범을 놓고 여야의 힘겨루기가 팽팽하다.
국민의 힘이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원으로 대검 차장검사 출신의 임정혁 변호사와 대한법률구조공단이사장을 역임한 이헌 변호사를 내정하자 더불어민주당은 곧바로 자격을 문제삼고 나섰다.
민주당은 특히 야당의 지연 전술로 공수처가 연내 출범하지 못하면 공수처장에 대한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의 공수처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야당과 다수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이다.
민주당이 지난해 12월 정의당과 짬짜미해 통과시킨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원은 모두 7명으로 여야가 각각 2명씩 4명, 법무부와 법원행정처, 대한변협에서 한 명씩 추천위원을 낸다.
이들이 2명의 공수처장 후보를 선정하면 대통령이 한 명을 최종 낙점한다.
그런데 추천위에서 후보를 결정하려면 7명 가운데 6명이 동의해야 한다. 야당 추천위원 2명이 반대하면 후보를 내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여당은 공수처 출범이 늦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야당의 비토권을 삭제하고 추천위 소집 후 최대 40일 이내에 처장 후보를 의결하도록 하는 내용의 공수처법 개정안을 냈다.
여당으로선 공수처법 처리 당시 정의당이 교섭단체가 될 것으로 보고 공수처장 후보 의결 정족수를 '6명 동의'로 했다가 국민의 힘이 비토권을 갖게 되자 부랴부랴 '5명 동의'로 줄여 야당 거부권을 없애는 꼼수를 꺼내든 것이다.
민주당이 공수처법 개정안에 집착하는 것은 야당이 끝까지 비토권을 행사할 경우 집권 후반기 레임덕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조국, 추미애 전현직 법무부장관처럼 자신들 입맛에 맞는 공수처장 임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2일 "공수처는 입법과 행정적인 설립 준비가 이미 다 끝난 상황인데도 출범이 늦어지고 있다"며 여당을 독려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민주당이 숫적 우위를 앞세워 법에 정해진 야당의 권한까지 무력화하는 것은 법적 정당성을 무시하는 독선이자, 의회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폭거나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국내 대표적인 진보논객인 강준만 전북대 교수마저 "(공수처법은) 개혁진보 진영 내에서도 '민주주의에 있어 지극히 위험한 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며 "(정권은) 이 법에 반대하면 수구 기득권 세력이라는 딱지붙이기에 열을 올려왔다"고 힐난했겠나.
더 큰 문제는 공수처법에 포함된 '검·경수사 강제 이첩권'과 '공수처 검사의 기소권' 같은 독소조항들이다.
공수처법에는 검·경이 고위공직자 범죄를 인지한 즉시 공수처에 통보하고 공수처가 요청하면 이를 이첩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또 판사, 검사와 경찰(경무관급이상) 비리에 대해 공수처 검사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함께 부여하는 조항도 포함돼 있다.
즉 공수처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 수사를 언제든지 넘겨받을 수 있고, 법과 원칙에 따라 소신을 지키다 정권에 미운 털이 박힌 판·검사들도 얼마든지 손볼 수 있는 셈이다.
정치권 안팎에선 공수처가 출범하면 그 첫 번째 대상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여권에서 그동안 "공수처가 설치되면 윤석열 검찰총장 부부가 수사 대상 1호가 될 수 있다"고 엄포를 놨는데 이 경고가 결코 빈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추미애 법무장관은 라임사태와 관련해 지난 22일 "검찰의 검사 비위 은폐 여부 등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며 감찰을 지시했고, 26일에는 옵티머스 사태과 관련해 윤 총장 감찰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감찰 결과에 따라 윤 총장 해임 건의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무부 감찰로 윤 총장 연루의혹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을 경우 여권에선 '윤 총장 찍어내기'를 위해 공수처가 이 사건을 수사하도록 압박할 소지가 다분하다.
라임·옵티머스의 여권로비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도 공수처가 넘겨받아 적당히 무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권이 공수처 카드를 만지작거릴 때부터 "윤 총장 제거와 권력수사 물타기라는 프레임을 가동해온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게 될 공수처가 정권의 눈치를 보거나 권력자에게 '입 안의 혀'처럼 굴어선 국가적으로 불행하다.
엄정하고 공평한 수사로 권력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솎아내고 경종을 울리는 것이 공수처의 진정한 역할이다.
공수처가 외압에 무릎 꿇는다면 과거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던 검찰·경찰 조직과 다를 게 없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법치와 정의를 무너뜨리는 지름길이다.
공수처가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민주적 통제를 받는 사정기관이 될 수 있도록 온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박정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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