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으로 희생되고 삶의 터전을 잃은 월미도 주민들의 이야기, 추석 연휴를 맞아 연속으로 전해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6년 전, 지상 최대의 상륙작전으로 불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상황은 인천상륙작전의 예고편과 다름 없었는데요.
민간인 희생자가 2만 명에 달했던 당시 상황을 정규해 기자가 알아봤습니다.
【 기자 】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프랑스 아로망쉬 해변.
2,200대 이상의 연합군 폭격기와 병력 8만 7천여 명은 80km에 달하는 5개 해변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했습니다.
해변에서 11km 떨어진 도시 '캉'은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무려 500여 대의 폭격기가 동원됐습니다.
▶ 인터뷰 : 콜레트 카트린 / 민간인 폭격 피해자
- "자동차, 운송 수단 같은 모든 장비들이 공출됐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었죠."
도시의 70%가 무너졌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희생된 민간인 숫자는 2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으로 본격화된 공중전은 민간인 보호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오직 전쟁의 승리를 위해 무차별 폭격이 감행됐습니다.
▶ 인터뷰 : 장 퀘이앙 / 역사학자
- "대부분의 폭격은 굉장히 무의미했습니다. 모두 그것을 나중에 알았죠. 노르망디 작전에 참전한 군인들을 포함해서요."
거리로 내쫓긴 수만 명의 주민들은 수도원과 성당으로 대피했고 생장의 한 성당은 당시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 인터뷰 : 로헝 베흐투 / 생장성당 신부」
- "포디에 여사님이 6일에 돌아가셨고 7번가에서 전소돼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가루가 됐다'는 표현이 있어요. 이는 폭격의 잔혹함을 보여줍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예고편과 같았던 이 전쟁은 모든 것을 휩쓸어 갔고, 희생된 민간인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경우가 상당수였습니다.
MBN뉴스 정규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