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으로 희생되고 삶의 터전을 잃은 월미도 주민들의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월미도 확보를 위해 폭격을 감행한 미군이 여성과 아이 등 민간인 거주를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쟁점입니다.
당시 미군의 항공폭격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민간인 식별이 가능한 높이에서 폭격이 이뤄졌습니다.
배준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기자 】
폭격에 살아남은 월미도 주민들은 전투기에서 발사된 기총소사에 대한 기억이 뚜렷합니다.
▶ 인터뷰 : 전청봉 / 월미도 폭격 생존자(당시 17세)
- "고도가 제 생각에도 병사 얼굴이 보일 정도예요. 얕게 떠서 50미터인가 70미터 높이인가 그것밖에 안 되는 것 같아."
미군 항공공격보고서에는 단 한 번만 500피트, 약 150m에서 폭격이 이뤄졌고 나머지는 100m 이하의 높이에서 폭격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1949년 체결된 '전시 민간인 보호를 위한 제네바 협약'에 의해 특별한 보호대상으로 분류된 아동과 여성 등의 존재를 식별할 수 있는 높이였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한국 해군첩보대가 파악한 북한군의 숫자는 400명이었지만 미군은 주민 600명을 더해 1천 명의 북한군이 있었다고 보고한 기록이 확인됐습니다.
▶ 인터뷰 : 김구현 /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 "작전을 개시할 때 적군을 1천 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작전을 한 것 같아요. 아예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했고 천 명이라고 간주하고 작전을 수행했어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서울을 탈환하고 전쟁의 판도를 바꿔놨지만, 월미도 주민들에게는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마을은 미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1971년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고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 인터뷰 : 정지은 / 월미도 폭격 생존자 (당시 7세)
- "6·25 전쟁이라는 건 어느 국민이나 다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고향, 자기 땅은 다 찾았어요. 월미도 사람만 지금 고향을 70년 동안 못 들어가고 있어요."
지난해 69년 만에 처음으로 월미도 희생자를 위한 인천시 조례가 만들어졌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주민들은 자신을실향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MBN뉴스 배준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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