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에 의해 사살·소각당한 공무원 A씨 사건 처리에서 정부와 군은 비겁과 무능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두 대목에서 절망한다.
북한 선박이 표류중인 A씨를 발견한 것은 22일 15시30분이었고 상부 지시로 출동한 북한 단속정이 A씨를 사살한 것은 21시40분께였다. 약 6시간 동안 A씨는 부유물에 의지해 바다에 뜬 채로 북한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 전 과정을 군은 정보자산을 통해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대통령에 첫 보고는 18시36분에 이뤄졌다. 그게 전부였다. 왜 방치했느냐는 질문에 군은 "북한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답했다. 북이 대한민국을 포격해도, 핵미사일을 날려도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말할 위인들 아닌가. 국군이 어쩌다 이렇게 됐나.
대한민국 국민이 적의 해역으로 떠내려갔다. 북한 선박이 그를 발견했는데 배 위로 끌어올리지도 않고 지켜보고 있다. 가을 바다는 차다. 이미 탈진했을 것이고 저체온으로 죽을수도 있다. 대한민국이 작동하는 나라라면 이 위태로운 국민을 보호하려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그 대단한 남북정상간 핫라인이야 그렇다치고(지난 6월 김여정이 차단해버렸다) 북한 당국에 전통 하나 넣을 실무 핫라인은 있을거 아닌가. 없나? 국정원·통일부는 공밥 먹는 조직인가. 요즘 북한이 전화 받아줄 심기가 아니라 치자. 그러면 아무것도 안해도 되나. 경고 비행, 근접 항해, 하다못해 대북 확성기 방송이라도 틀어야 할 거 아닌가. 현장은 아니더라도 확성기가 미치는 북한 군부대는 있을거 아닌가. 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보고받은 청와대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언론에 처음 보도된 것은 23일 밤이었다. 기사는 군 당국을 인용해 A씨가 월북을 시도하다 피격된 것으로 썼다. 24일 오전 공식 브리핑에서도 자진 월북 정황이 강조됐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래도 명예는 있고 유족의 명예도 있다.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월북 정황으로 제시된 것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신발을 벗어두고 갔다길래 운동화쯤 되겠거니 했다. 슬리퍼라고 한다. 슬리퍼는 수시로 신었다 벗었다 하는 신발아닌가. 구명조끼 입은 것도 정황에 포함됐다. 배에서 구명조끼 입으면 안되나. 평소 빚에 시달렸다고 한다. 2000만원대라고 한다. 대한민국 공무원이 2000만원 빚 때문에 월북을 한다? 나 같으면 연금이 아까워서라도 절대 그렇게는 안한다. 살인범죄를 저지르더라도 평생 교도소에서 썩고 말지 북한에는 절대 안간다.
설령 보다 확실한 월북의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시점에 당국이 나서서 강조할 이유는 없다. 민간인 사살이라는 사안의 본질과 무관하다. 당국이 월북을 부각시켜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6시간 동안 아무 구호 조치도 취하지 않은 '부작위'가 켕긴다면 그럴수 있다. '북이 좋다고 넘어간 사람, 정부라고 별 도리 있나.' 이런 면책 기대 심리에서 월북을 강조하는 것 아닌가.
A씨가 월북을 시도했다고 치자. 그게 바다에 뜬 국민을 6시간 방치할 이유가 되나. NLL 넘어가는 순간 국민권 소멸인가. 결별을 통보하고 밖으로 뛰쳐나간 애인이 자동차에 치어 신음하고 있다. 이미 관계 정리됐으니 119에 전
무능한 사람이 비겁하기까지하면 상종하기 싫어진다. 국민 생명을 보호하는게 가장 큰 존재이유인 국가가 바로 그 지점에서 무능을 드러냈다. 그 무능을 조금이라도 가리려 확실한 증거도 없으면서 자꾸 월북을 말한다. 자존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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