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좌파가 더 도덕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좌파 스스로들 뿐이다. 좌파에게 '넌 왜 진보인척 하면서 생활은 그 모양이냐'고 따져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진보는 더 도덕적일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말도 안된다. 이념과 도덕성은 아무 상관없다. 따라서 좌파를 겨냥한 질문은 '넌 왜 더 도덕적이지 않느냐'가 아니라 '넌 왜 더 도덕적인 척 하느냐'가 되어야 한다.
박원순 성추문 사태는 박 전 시장이 속해 있었던 '이른바' 한국 진보 혹은 좌파 진영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들이 더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거듭 말하지만 이걸 따지는건 무의미하다. 따져볼 것은 글로벌 진보 기준에서 한국 진보를 과연 진보로 볼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다. 세계적으로 진보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PC는 '출신, 인종, 성,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장애, 종교, 직업, 나이 등을 기반으로 한 언어적·비언어적 모욕과 차별을 지양하는 사회 운동'으로 정의된다. 진보운동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함정으로 현실의 PC역시 위선적, 관념적, 가식적인 속살을 종종 드러낸다. 미국 흑인차별 철폐 시위대들이 백인중심 역사를 부정한다며 링컨 동상까지 공격하는 것이 한 예다.
부작용이 있다 해서 PC자체를 부정한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진보운동은 없을 것이다. 진보라는게 원래 현실보다는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비록 발은 진흙밭에 딛고 있다 하더라도 손은 연꽃을 가리켜야 한다. 예컨대 종종 아내에게 손찌검하는 남편도 관념으로는 남녀평등을 열망할 수 있다. 머리로는 사회 양극화에 반대하면서 격차해소를 위해 대기업 정규직 임금인상률을 억제하자는 제안에는 결사 반대하는 대기업 직원도 있다. 모순되지만 언행일치가 진보의 자격요건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을 진보주의자가 몇이나 될지 감이 오는가
같은 연장선에서 박원순이 여비서를 상대로 성추행을 했다고 해서, 그가 겉으로 보인 '친페미니스트' 이미지와 상반되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가 진보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겉으로는 페미니즘을 말하고 뒤로는 속옷 사진을 여비서에게 전송하는 행동은 몹시 그로테스크하긴하다. 그러나 진보는 표리부동을 금하고 있지 않다. 글로벌 PC주의자들중에서도 이런 사례가 곧잘 있다.
내가 진보의 자격을 의심하는 것은 박원순이 아니라 그를 변호하는 진영이다. 그들은 거의 예외없이 한국적 진보 혹은 좌파 진영에 속한 인사들이다. 그들이 진보라면 시장과 여비서라는 권력구도에서 발생한 성적 접촉을 개인 문제로 치환해서는 안된다. 그건 진보가 아니다. 이런 경우 접근법은 약자 중심, 피해자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강자 중심, 가해자 중심으로 접근하는 진보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심지어 '피해자'라 부르지도 않고 '피해 호소인'이란 말로 2차 피해의 주체가 되고 있다. 어느 여성 방송 진행자는 "4년 동안 뭐하다 이제 와서"라며 피해자 동기를 의심하는가 하면 "나도 박시장 팔짱꼈으니 성추행"이라며 황당한 말장난으로 박 전 시장을 '쉴드 치는' 여검사도 나왔다. 미투 이슈때마다 피해자 대변인처럼 행동하던 '원조 미투' 여성은 "왜 내게 입장을 강요하느냐"며 입을 닫았다. 소위 '진보교수'라는 어느 학자는 성폭력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박원순같은 사람은 100조원이 있어도 복원할 수 없다"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이 경우 문제는 저들의 가식이 아니라 너무 가식이 없다는 것이다. 진보고 뭐고 이념이고 뭐고 체면이고 뭐고 오직 '나'와 '우리 진영'의 정치적 이해가 중요하다(그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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