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경찰이 19일 김정남 암살과 관련한 수사 결과를 전격 발표하며 북한이 배후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북측이 김정남의 뒤를 집요하게 추적해온 정황이 드러났고, 체포된 용의자가 특수 신분이라는 점 등 북한 당국이 치밀한 사전 계획 아래 살인을 저질렀다는 정황이 속속 공개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현지 공관을 중심으로 말레이시아 당국에 강력히 반발하는 등 초조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북한 국적 리정철이 '키맨'
지난 17일 밤 체포된 리정철(46)은 이번 김정남 사건 수사에서 핵심적 인물로 떠올랐다. 말레이시아 언론들은 리정철이 여성 용의자인 도안 티 흐엉(29)와 시티 아이샤(25)를 가장 먼저 접촉하고 이후에도 연락을 취해온 사람이라고 전했다. 현지언론 중국보는 리정철이 주말레이시아 북한 대사관과도 접촉했던 적이 있고 '매우 특수한 신분'이라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말레이시아 경찰은 결정적 증거가 될 '독약 장갑'을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현지 중문매체 성주일보가 보도했다. 경찰은 아직 독극물 의심물질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도안 티 흐엉은 당시 장갑을 끼고 직접 연고나 로션 같은 물질을 김정남에게 뿌렸으며 자신은 그것이 독약인지 몰랐다고 주장했다.
또 흐엉을 사주한 한 남성이 이 독약 의심 물질을 장갑을 낀 흐엉의 손에 따라줬고 흐엉은 김정남을 습격한 뒤 곧바로 여자화장실로 달려가 장갑을 벗고 손을 씻었다고 전했다. 경찰은 흐엉이 진술한 이 '독약 장갑'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흐엉이 왜 중독되지 않았는지를 집중 추궁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남성 용의자 4명은 김정남의 뒤를 밟으며 약 1년 전부터 암살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트레이츠타임즈는 용의자들이 마카오-싱가포르-말레이시아를 김정남이 오갔던 패턴을 파악했고 암살이 벌어진 13일 오전 7시 30분부터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현장에서 불과 50m가량 떨어진 공항 내 식당 '비빅 헤리티지'에 있었던 모습이 CCTV에 잡혔다고 전해졌다.
남성 용의자 4명 중 3명은 범행 직후 옷을 갈아입고 인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말레이시아 언론이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북한, 음모론으로 물타기
말레이시아 당국의 수사가 진척되면서 궁지에 몰린 북한의 대응에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다. 북한은 물밑 교섭을 통해 김정남 시신을 부검 없이 조기 인수하려던 시도가 여의치 않자, 한국 정부까지 끌어들인 '음모론'으로 사건의 진상을 흐리고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 당국의 부검결과 발표를 인정할 수 없다며 외교 마찰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 직원들은 18일 리정철 면담을 요구하다 불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현지 공관의 '돌발 행동'도 발생했다. 사건 발생 이후 침묵으로 일관하던 강철 주말레이시아 북한 대사는 지난 17일 밤(현지시간) 쿠알라룸푸르 종합병원 영안실 앞에서 긴급 성명서를 발표하며 "우리가 입회하지 않은 가운데 이뤄진 부검결과를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한국 정부가 정치 스캔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며 "이를 위해 이번 사건을 이용해 북한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다"고 노골적 물타기에 나섰다.
북한 당국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 정부는 사건 처리를 서두르고 있다. 수사 총책임자인 칼리드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이 해외 방문 중으로 공석인 가운데 말레이시아 경찰이 일요일에 기자 회견을 연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신종 독극물 사용했나
김정남의 사인을 밝혀 줄 부검 결과에 대한 말레이시아 당국의 발표가 늦어지면서 갖가지 추측이 쏟아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김정남이 사망한지 이틀만인 지난 15일 시신 부검을 완료했으나 나흘이 경과한 19일 현재 결과 발표를 미루고 있다.
북한이 부검 결과 발표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현지 언론에선 1차 부검에서 사인을 밝혀내지 못함에 따라 2차 부검을 실시할 것이란 보도까지 나왔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당국은 재부검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혀 혼선이 빚어졌다.
부검 결과 발표가 늦어지는 원인은 두가지 정도로 추정된다. 먼저 김정남 암살에 사용된 독극물이 기존에 알려진 종류가 아닌 새로운 화학물질일 가능성이다. 말레이시아 일간지인 '더스타'는 이날 현지 독물학자의 발언을 인용해 "범인들이 통상적 화학물질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며 "새로운 화학물질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부검에서 명확한 사인을 규명하지 못하도록 독극물을 혼합하거나 아예 새로운 독극물을 만들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용의자로 체포된 북한 국적의 리정철이 화학 분야의 전문가라는 점도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또 다른 가능성은 말레이시아 당국이
[쿠알라룸푸르 = 박태인 기자 / 서울 = 안두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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