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후 예정에 없이 국회 정론관에 등장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입에서 "정치교체와 국가통합을 이루려던 순수한 뜻을 접겠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기자석에선 장탄식이 쏟아졌다. 불과 30분 전 매일경제 기자와 통화했던 권영세 전 새누리당 의원과 박수영 전 경기부지사 등 캠프 핵심들조차 전혀 불출마를 예상하지 못한채 향후 행보를 고심하는 분위기였다. 측근들은 여의도 대하빌딩에 캠프 사무실까지 구하고 3일 오픈을 위해 이날부터 내부 공사에 들어간 상태였다.
다만 일부 핵심 참모는 이날 오전부터 기자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등 미묘한 이상 기류가 흘렀다는 전언도 있다. 캠프 내부에선 창당과 정치결사체, 기존 정당 입당을 여러가지 옵션을 놓고 갑론을박을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위기감은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불출마의 가장 큰 배경이 된 것은 역시 지지율 하락이었다. 지지율이 높아야 합종연횡의 키를 쥘 수 있었으나 여론은 반 전 총장의 애매모호한 행보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렸다.
앞서 반 전 사무총장은 지난 달 12일 귀국한 뒤 지지율이 계속해서 하락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반 전 총장은 지난 1월 첫째주와 둘째주까지만 해도 각각 지지율 21.5%, 22.2%를 기록하며 유력 대권 주자인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1월 첫째주 26.8%, 둘째주 26.1%)와 접전을 펼쳤다.
하지만 1월 넷째주에는 지지율이 15.4%에 그치면서 문 전 대표(32.8%)와의 격차가 두 배 이상까지 벌어졌다.
지지율 반등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정치 공세가 가속화되자 결국 대선 불출마로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전날 그가 돌파구로 꺼내든 '개헌 추진협의체' 카드에 대해서도 정치권 반응은 싸늘했다. 반 전 총장도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이날 바른정당 의원들과 만나 "이제 을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의 표정에서 이때까지도 불출마 분위기를 읽기는 힘들었다.
이날 반 전 총장은 새누리당과 바른정당, 정의당을 잇달아 방문하고 개헌 추진 협의체 구성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반 전 총장은 새누리당을 찾아 "개헌에 드라이브를 걸자는 측면에서 (개헌협의체를) 제안했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또 "일부 당에서는 개헌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며 "일부 어떤 당이나 대표가 그런 데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동의하는 정당이나 정파끼리라도 모이자"며 반문연대 구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개헌 필요성에 화답하면서도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인 비대위원장은 "나이가 들어 미끄러져 낙상하면 큰일이다. 특히 겨울엔 미끄러워서 여기저기 다니면 낙상하기 쉬워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 전 총장은 "알겠습니다"라며 받아넘겼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인 비대위원장은 "내가 떠나는 반 전 총장에게 한 마디 딱 했다. '바람 따라 다니다가 나라가 이 모양이 됐다. 당신 따라다니려고 하는 사람 조심하라'라고 했다"고 전했다.
바른정당도 마냥 반 총장을 반기진 않았다. 정병국 바른정당 대표 등은 이날 당사를 방문한 반 전 총장에게 직접 입당 권유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개헌 추진에 대해서도 화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승민 의원 등은 대선 전 개헌에 대해 확실한 반대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정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바른정당 경선 스케줄은 바른정당 로드맵대로 진행될 것"이라며 "반 전 총장의 입당 여부에 따라 룰이 바뀌거나 로드맵이 바뀌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반 전 총장과의 연대 방안에 대해서도 "당 대 당 통합이라는 것은 없다"면서 "지향하는 방향이 같으면 들어오면 된다"며 입당을 압박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서산대사의 어록을 인용해 "천년 학도 집 나서면 뭇짐승의 공격을 받는다"며 높은 현실정치의 벽에 직면한 반 전 총장을 위로하기도 했다.
야권의 압박은 더 셌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이날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대권욕을 위해서라면 국가 백년지대계인 개헌도 정략적으로 이용해야 하는지 개탄스럽다"며 반 전 총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반 전 총장의 '촛불민심이 변질됐다'는 발언에 대해서도 "변질된 것은 촛불민심이 아니라 반 전 총장의 초심"이라고 힐난했다.
일각에선 반 전 총장이 측근들과 숙의없이 불쑥 불출마를 결정한 데 대해 외교관 출신의 한계라는 비판도 내놓았다.
그는 개헌 반대론자를 향해 "지극히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라고 비판하고 자신을 향한 일부 언론의 비판을 가리켜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라고 주장했다.
[신헌철 기자 / 안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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