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일 박근혜 대통령의 퇴임 후 ‘신분 보장’ 문제를 처음 언급하고 나섰다. 그동안 정치권 일각과 원로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거론되던 “박 대통령에게 퇴로를 열어주자”는 논의에 유력 야권 대선후보인 문 전 대표가 본격적으로 불을 지피고 나선 것이다.
문 전 대표는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야권 대선주자들과 함께 현 시국 관련 긴급회동을 갖고 “박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서 구속될만한 충분한 사유가 드러난 만큼 스스로 결단하고 퇴진을 선언하라”며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준다면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게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이대로 시간을 끌면 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미움이 갈 수록 커져 수습할 수 없게 돼 불행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며 “하지만 박 대통령이 (하야를) 결단한다면 퇴진 후에도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박 대통령이 당장 하야를 결정할 경우 퇴임 후 검찰에 출두해 구속 수사를 받거나 기소되는 굴욕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되는 발언이다. 더 나아가 퇴임 후 성난 민심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안전 상 문제까지 꼼꼼히 챙기겠다는 얘기로도 해석된다.
문 전 대표의 이번 발언은 그동안 정치권 일각과 재야원로들 사이에서 거론돼 온 박 대통령의 퇴임 후 신분보장 문제를 공론화한 것이다. 민주당 수도권 재선의원은 “박 대통령이 지금 저렇게 버티고 있는 것은 퇴임 후 구속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청와대와 물밑대화를 통해 퇴임 후 신분 보장 관련 대타협이 성사될 경우 박 대통령의 하야 문제가 쉽게 풀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퇴임 후 신분보장 문제는 최근 민주당 지도부에서도 논의되고 있는 사안이다.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1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거부하는 것을 두고 “이런 식으로 하면 박 대통령의 퇴임 후 안전도 보장할 수가 없다”고 경고했다. 바꿔 말하면 박 대통령의 입장 변화에 따라 야권도 퇴임 후 신분 보장 문제에 협력할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대표 보수 원로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도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이 분노한 민심에 응답하려면 망명이 가장 좋은 해결 방식이다. 하야해서 즉각 망명하면 간단히 끝난다”며 “재판이니 뭐니 할 것 없이 망명하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은 솔루션”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 박 대통령의 퇴임 후 신분 문제는 외교가에선 이미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다. 익명을 요구한 민주당 의원은 “최근 주한 중국대사와 면담을 했는데 박 대통령의 퇴임 후 신분 문제를 정치권에서 어떻게 협의해 나가고 있는지 묻더라”며 “국내 외교가에선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크고 이와 관련된 내용을 본국으로 보고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100만 촛불집회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전국민적 분노가 확인된 상황에서 박 대통령의 퇴임 후 신분보장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야권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대통령도 불법행위를 했다면 법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론 앞에서 정치적 해법을 모색하다가 역풍을 맞을 수 있어서다.
이런 우려에서 문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김경수 민주당 의원은 “문 전 대표의 발언은 ‘박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지금 즉각 퇴진하는 결단을 내린다면 국민들도 정치권도 박 대통령이 최소한의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겠는가’라는 뜻에서 한 얘기”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나섰다.
한편 이날 문 전 대표 외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김부겸 민주당 의원, 이재명 성남시장 등 야권 대선주자 6명과 심상정 정의당 대표, 천정배 전 국민의당 대표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나 현 비상시국 해법을 논의했다.
이날 회동에서 야권 주자들은 “박 대통령의 범죄사실이 명백하고 중대해 탄핵사유가 되는 만큼, 야3당이 탄핵추진을 논의해줄 것을 요구한다” 등 8개 합의사항을 도출했다. 탄핵추진 외 주요 합의사항을 살펴보면 △야3당은 대통령 퇴진과 탄핵에 따른 국정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회주도 총리 선출 및 과도내각 구성 등 수습방안을 조속히 마련할 것 △박 대통령의 퇴진만이 국정공백을 최소화하고 헌정질서를 바로 세우는 길 △검찰은 지체없이 대통령을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할 것 △박 대통령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등 국정운영에서 완전히 손을 뗄 것 등이다.
특히 야권주자들이 일제히 정국수습책으로 박 대통령의 탄핵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면서 향후 정국은 책임총리 선출 및 조기대선 준비 등 박 대통령 탄핵 후 로드맵 설정에 모아질 전망이다.
김부겸 민주당 의원은 “검찰 발표를 보니 박 대통령에게 탄핵을 물을 수밖에 없게 됐다”면서 “국회가 책임총리 문제를 결론내고, 책임총리가 국민들에게 수습책을 밝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국민은 (5차 촛불집회가 예정된) 26일까지 시한을 줬다. 박 대통령이 그때까지 사퇴 안하면 국회는 헌법에 의거해 탄핵절차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구체적인 탄핵추진 시점까지 제
다만 이날 회동에선 책임총리를 두고 야권 주자간 이견도 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오늘은 (각 주자들이 생각하는 책임총리 인선에 대한) 공통분모를 도출해 정리했다”며 “국회에서 이후 적극적으로 길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
[오수현 기자 / 김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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