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설업체 소속 A이사는 해외 사업수주를 위한 규제 완화와 국책은행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자금 조달을 위한 협의차 국토교통부 담당국장 B씨를 찾아갔다. 은밀한 만남은 아니었고, 방문증을 발부받은 뒤 B국장의 사무실에서 만나 지원 방안을 협의했다.
#2. 중소기업 사장 B씨는 정부조달 입찰 과정에서 대기업에 비해 편의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지 알아보고 싶었다. 규정을 벗어나는 특혜를 요구할 의도는 없었지만 중소기업청에 담당자 이메일 주소를 물어본 뒤 개별적으로 질문을 적어보냈다.
오는 9월 28일 김영란법 시행 이후 ‘부정청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례들이다. 지금은 합법적인 민원 루트지만 앞으로는 부정청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법무법인 광장의 이종석 변호사는 “민원 담당관을 거치지 않고 기업인이 직접 담당 업무를 하는 공무원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는 것은 부정청탁에 해당되는 것으로 본다”며 “이메일도 부정청탁의 예외적용을 받는 ‘공개적인’ 민원으로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민원창구에 서류를 접수하거나 공청회에서 의견을 내는 등 공개적 행위 외에는 대부분 부정청탁이 된다는 게 이 변호사의 설명이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예기치않게 ‘부정청탁’으로 적발되는 사례가 급증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법 시행이 불과 두달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민원’과 ‘청탁’의 경계는 여전히 모호하다. 자칫 공무원 사회가 김영란법을 빌미로 집단적인 ‘민원 기피증’에 빠져들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앙부처 고위공무원 A씨는 “지금도 공직사회를 부패집단으로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늘고 있다”며 “공직자들의 책임도 있지만, 이 같은 분위기가 앞으로 정상적인 민원 수렴까지 꺼리게 만들 수 있다”고 염려했다.
논란이 커지면서 지난 22일 국민권익위원회가 해설집을 냈지만, 적용범위가 방대한데다 예외규정도 많아 여전히 교통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특히 ‘직무관련성’ 등 모호한 규정과 관련해 권익위 스스로도 “판례 축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만 밝히고 있어 단기적으로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을 부추길 것이라는 염려가 커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B국장은 “내가 판례가 되고 싶지는 않다”며 “김영란법 시행 초기 일벌백계가 예상된다. 내년 초까지는 외부인과의 만남 자체를 자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세종시 이전 뒤 정부 부처들은 정보습득이나 민간 분야와 교류를 위해 간담회, 세미나 등을 통한 비공식 네트워크를 활발히 운영해 왔다. 세종시로 부처가 내려간 뒤 민간 분야와 접촉이 힘들어지자 공무원들이 자청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이 같은 모임도 꺼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정부 민간위원회에 소속된 전문위원들이 연임을 거부하거나 해촉을 요청하는 사례도 벌써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마디로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 싫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애초 의도와는 달리 법 시행 후 각종 청탁이 더욱 음성화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한 대기업 대관 업무 담당자는 “김영란법이 시행돼도 지연, 학연 등을 이용해 공직사회의 인맥을 꾸준히 관리할 수 밖에 없다”며 “당초 김영란법의 출발점이 관피아나 스폰서 행태를 없애고자 했던 것이
이에 대해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낳을 수 있는 김영란법의 모호한 규정을 좀 더 명확히 해야 한다”며 “민관 컨퍼런스나 세미나 관련 규정도 자칫 부정청탁과 얽히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