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 탈당의 명분은 ‘혁신 거부’에 있었다. 결국 혁신을 거부한 당의 ‘친노패권주의’를 비판하며 탈당한 것이다. 그가 주창한 ‘낡은 진보 청산’의 대상도 사실상 ‘친노와 586그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친노’와 ‘비노’라는 고질적인 야당의 계파 다툼이 결국 안 의원의 탈당까지 초래한 근본적 원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친노 진영은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될까지만 해도 당내에서 ‘비주류중의 비주류’였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당선 뒤 지난 10여년간 20~30대와 수도권 중심으로 주로 온라인에서 강세를 보이는 ‘친노세력’이 구축되면서 야권 최대 세력으로 부상했다.
현재 범친노 진영 내에는 문재인 대표, 안희정 충남지사, 정세균 전 대표 중심으로 계보군이 형성돼 있다. 여기에 박원순 서울시장과 가까운 시민사회단체 그룹, 80년대 학생운동 지도부 중심의 ‘586그룹’도 포함된다.
비노 진영도 다양한 그룹을 포괄하고 있다. 동교동계 등 김대중 전 대통령 추종세력은 박지원계로,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던 ‘천·신·정’의 잔존그룹은 김한길계로 포괄된다. 손학규 전 대표, 김부겸 전 의원 등 여권에서 야권으로 합류한 세력, 유성엽·황주홍 의원 등 지자체장으로 지역에 뿌리를 내렸던 토착 호남 세력도 포함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한 2003년 이후 야당사를 보면 범친노 진영이 사실상 당을 장악해 왔다. 범친노 진영은 정동영·김근태 전 의원이 열린우리당을 장악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후반기, 손학규 전 대표가 당권을 잡았던 2008년, 김한길·안철수 전 대표가 당을 장악했던 2013~14년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간 동안 당의 주류 세력이었다. 중간에 비대위 체제가 여러번 구성됐지만 비대위원장들도 대부분 범친노에 속한 인물이었던 적이 많았다. 2003년 이후 지난 13년간 최소 8년 이상을 주류로서 군림해 왔다.
노사모를 결성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될 때까지 친노진영은 한국 사회의 ‘역동성’의 표상이었다. 어려운 길인 줄 알면서도 지역주의 청산을 위해 줄기차게 부산·경남의 문을 두드린 것도 친노 진영이 한국 사회에 끼친 긍정적 영향이다. 그러나 이같은 훌륭한 명분은 부작용도 낳았다. 자기만이 옳다는 ‘선민의식’에 빠진 점은 보수 진영 뿐 아니라 진보 진영 내에서도 비판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독재정권 시절 어렵고 고된 길을 갈 때는 이같은 ‘선민의식’이 도움이될 수 있지만 집권 이후에도 이같은 습관이 바뀌지 않으면서 많은 문제점을 양산했다. ‘대화와 타협’에 능하지 않은 비타협적인 자세에 여당 뿐 아니라 야당 내 다른 계파에서도 “같이 하기 어렵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순혈주의’와 ‘배타성’, ‘폐쇄성’도 친노진영의 문제점으로 대두된다. 과거 노무현 정부 탄생의 주역이었던 정동영·천정배 등이 당의 진로를 놓고 이견이 있다는 이유로 ‘배신자’의 낙인을 찍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손학규 전 대표, 김부겸 전 의원 등 한나라당 탈당파에 대해 “여당에 몸담았던 사람”이라면서 낙인을 찍고 끝까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 것도 친노 진영의 이같은 성향에 기인한다. 또 정치 협상의 과정에서 공식 라인만 있고 물밑 협상을 하기 어렵다는 문제점도 여러 차례 제기됐다. 소수의 핵심 친노 인사들을 제외하면 범 친노에 속한 인사들 조차도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었다.
안철수 의원이 ‘낡은 진보 청산’을 외친 것도 이같은 친노 진영의 행태와 맥이 닿아 있다. 안철수 의원은 “과거에 운동권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아직까지 그런 것을 따지고 있는 것이 새정치민주연합의 현실”이
안 의원 탈당 이후에도 친노진영에서는 “나갈 사람이 나간 것”이라는 냉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친노 진영이 앞으로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이같은 폐쇄적 자세를 지양하고 전략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함양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당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박승철 기자 / 정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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