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지극히 단순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바둑보다 더 복잡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치 9단, 정치 10단의 높은 수를 초선들은 선뜻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안철수 의원은 초선입니다.
한때 유력 대권후보였지만, 그의 정치경력은 초선에 불과합니다.
그런 초선이 정치 9단이나 10단에 버금가는 '탈당'이라는 초강수를 뒀습니다.
안철수 의원의 말입니다.
▶ 인터뷰 : 안철수 / 국회의원 (오늘)
-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은 평생 야당만 하기로 작정한 정당입니다. 개혁을 하는, 혁신을 하는 척만 하지. 더 큰 혁신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조그만 기득권도 내려놓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안철수 의원의 탈당은 호기로웠습니다.
주변의 탈당 만류를 단호히 뿌리치고, 마이웨이를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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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브잡스가 마이웨이를 통해 다시 애플을 접수했던 그 그림이 재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나봅니다.
정말 안철수 의원은 스티브잡스처럼 다시 새정치로 돌아가 당을 접수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전제가 틀렸습니다.
안철수 의원은 자신을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창업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닙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은 민주당이고, 그 전신은 열린우리당이고, 또 그 전신은 평화민주당까지 올라갑니다.
비록 안철수 의원이 김한길 의원과 함께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했지만, 그건 당명 개명에 불과한 것이고 그 뿌리는 이처럼 과거로 과거로 이어져있습니다.
안철수 의원이 정치권에 뛰어들기 전부터 이런 뿌리를 갖고 있던 의원들은 솔직히 말해 안 의원을 공동창업주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진중권 동양대 교수의 말처럼 판을 뒤흔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광 파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느끼고 있을 지 모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자신이 창업했지만, 쫓겨났다가 다시 애플을 접수한 스티브 잡스와 안철수 의원은 명백히 다른 겁니다.
그렇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의 비주류 의원들은 안철수 의원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공동창업주 가운데 한명이 나갔으니, 대거 우르르 그 뒤를 따를까요?
아니면 그저 잠깐 왔다가는 나그네가 당을 떠난 거에 불과하니 그들은 그냥 당에 남는 것을 택할까요?
안철수 의원에게는 안타깝지만, 당내 기류는 후자 쪽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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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조국 교수는 SNS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천정배·안철수 의원 등 자신들의 '사실상의 수장'이 희망이 없는 정당이라고 규정하고 탈당했으면, 즉각 같이 탈당해 '수장'에게 힘을 모아줘야 하지 않나"
문 대표 흔들기를 했던 비주류를 향해 한 말입니다.
안철수 의원이 공동창업주가 맞다면, 그리고 정말 비주류의 수장이었다면 조국 교수의 말대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비주류들은 당을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호남의원들은 안 의원이 탈당한 직후인 어제 저녁 만찬을 갖고 탈당 여부를 논의했습니다.
▶ 인터뷰 : 김성곤 /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여수갑)
- "의견을 들어보니 생각보다는 탈당하는 의원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대체로 신중한 입장이었다."
문 대표와 각을 세우며 최고위원을 사퇴한 터라 탈당 가능성이 점쳐졌던 주승용 전 최고위원 역시 탈당 가능성을 멀리했습니다.
주 의원은 해결방법은 문 대표 사퇴밖에 없다면서 개별적 탈당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비주류 핵심 축인 김한길 의원의 탈당 여부에 대해서도 "아이, 안 나가요"라고 했습니다.
부산의 조경태 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 의원은 "20년간 지금의 야당을 지켜왔다"며 사실상 탈당 가능성을 부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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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탈당 가능성이 점쳐지던 의원들 가운데 정작 안철수 의원의 뒤를 따르겠다는 의원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안철수 의원을 통해 사실상 문재인 대표 흔들기를 했던 의원들이 지금은 모두 발을 빼는 걸까요?
그들이 원한 것은 탈당이 아니라 그저 문재인 대표의 대표직 사퇴와 친노로부터 당권을 빼앗는 것이었을까요?
그들은 하나같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치 9단들입니다.
탈당을 통해 얻을 이익과 불이익, 당에 남았을 경우 이익과 불이익을 면밀히 따져봤을 것이고, 당 잔류는 그런 고도의 셈법 속에 나온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안철수 의원은 어찌된 걸까요?
그저 이런 정치 9단들에게 이용당하고 낙동강 오리알이 된 신세일까요?
역시 초선 의원에 불과했던 걸까요?
전망은 아직 이르긴합니다만, 안 의원으로서는 많은 의원들이 자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는 기대는 조금 접는 게 좋을 듯보입니다.
그렇다고 안 의원이 탈당을 통해 잃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안 의원이 당에 남았다고 가정해봅시다.
2017년 대선에서 과연 문재인, 박원순이라는 두 거물을 꺾고 당의 후보가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조직과 세가 약한 안 의원이 문재인 대표를 경선에서 꺾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보입니다.
그렇다면, 안 의원으로서는 당 밖으로 나가 제3당의 대선후보가 되어 대등한 입장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후보에게 후보단일화를 하자고 외치는게 수 밖에 없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대선 후보가 문재인 대표가 되든, 박원순 후보가 되든 안 의원에게 불리할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박원순 시장에게도, 문재인 대표에게도 안 의원이 한번 씩 양보한 전력이 있는터라 이제는 자신에게 양보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국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안 의원이 이런 수까지 감안해서 탈당했다면 단순한 초선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권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탈당했다고 선뜻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명분으로는 그저 '새정치' '혁신'을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안철수 의원이 초선의원으로서 섣부른 선택을 한 것인지, 그래서 정치 9단의 비주류 의원들에게 이용당한 것인지, 아니면 나름의 9단 셈법으로 탈당한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