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이 천만 관객을 돌파한 건 단순히 영화가 재미있어서, 주연배우 최민식의 연기가 뛰어나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겁니다.
영화는 조선의 역사를 그렸지만, 그 역사에 반추된 2014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관객들 눈에 스며들어있기 때문일 겁니다.
관객은 1597년 '명량'에서 2014년 대한민국의 그 무엇을 봤을까요?
이순신 장군 같은 지도자의 부재, 국난을 이겨내는 백성과 군인의 용기, 왕이 아닌 백성을 향하는 공직자의 자세?
많은 메시지를 읽었을 겁니다.
특히 흥행을 이끌고 있는 40~50대는 답답한 2014년 현실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어떤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정치권도 이런 화법을 읽었을까요?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6일 수석들과 함께 영화 '명량'을 봤습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민관군이 함께 위기를 극복했듯, 경제 활성화와 국가 혁신을 한마음으로 추진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이순신 장군을 언급했습니다.
▶ 인터뷰 : 박근혜 /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2012년 4월5일 대구 유세 중)
-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하셨듯이, 이 12명의 후보가 대구, 우리나라 새누리당을 발전시키고 구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에 빠졌을 때 패배의식을 갖거나 뒤로 물러날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는 그 용기와 자신감을 닮고자 했나 봅니다.
지도자뿐 아니라 백성 스스로도 말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본 40~50대의 정서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줄 수 있는, 세월호 참사 뒤 어디로 갈지 헤매고 있는 대한민국호를 제대로 이끌 강력한 리더십을 바라는 지 모릅니다..
백성이 아니라 위정자들에 바라는 바가 더 큰 듯 보입니다.
같은 듯 다른 메시지입니다.
새누리당 이정현 최고위원도 영화 '명량'을 언급했습니다.
김무성 대표의 등에 업혀 함박 웃음을 짓는 그는 유머감각도 는 듯 보입니다.
▶ 인터뷰 : 이정현 / 새누리당 의원
- "제가 이정현 입니다. '명량'에 나오는 (배우) 이정현 말고. 왜 이렇게 안 웃어, 진짜 이상한 사람들. 나 갈래 그냥. "
지난 9일에는 새누리당 이인제 최고위원이 '명량'을 관람한 뒤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지도자의 충성심과 전략이 어떻게 나라를 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너무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정치인들은 빠짐없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국민의 삶과 동떨어진 쟁점을 갖고 지금 국회가 공전되는데 여야가 상대 얼굴 너머에 있는 국민의 마음을 보고 정치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김무성 대표는 13일에 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김 대표 역시 영화를 보고 난 뒤 이인제 최고위원처럼 지도자의 리더십을 언급할까요?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언급하는 건 현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 또는 기대가 담겨 있다고 해야 합니다.
새정치민주연합에도 영화 '명량'의 열풍이 예외는 아닙니다.
박영선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은 지난 4일 의원총회에서 당 혁신을 강조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 생각에 이르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심정이 우리가 이겨내야 할 시련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전병헌 전 원내대표 역시 트위터에 "이순신 장군은 330척 대 12척이라는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이겼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서 이긴 것이다. 우리는 장군에게서 죽어서 이기는 혁명적 개혁을 배워야 한다"고 관람평을 올렸습니다.
박혜자 새정치연합 의원의 말도 있습니다.
▶ 인터뷰 : 박혜자 / 새정치연합 의원(지난 7일)
- "'명량'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딸이 보자는데 내일쯤.) '충'이라고 하는 건 임금이 아닌 백성을 향한 것이다는 명대사가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후보자도 대통령이 아닌 국민 바라보는 장관이 돼주길 기대합니다."
▶ 인터뷰 : 황우여 / 사회부총리 후보자 (지난 7일)
- "이순신 장군께서 하신 일을 보면 늘 백의종군을 하시고 신하로서의 국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셨는데…."
이처럼 정치권은 모두 명량을 보고 명량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 명량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은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듯합니다.
왜 자신들은 백성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 그런 리더십을 갖추지 못했는지,
백성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백성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왜 알지 못하는지,
진정 왕이 아닌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하지 못하는지,
그런 자아성찰을 왜 하지 못하는걸까요?
지금 이 시대 정치인들이 그런 것 없이 이 영화 명량을 봤다면 영화는 그저 영화에 그칠 뿐입니다.
국민은 정치권이 영화 '명량'을 보면서 무언가 깨닫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을 정치권만 모르고 있는 걸까요?
알면서도 부끄러워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걸까요?
김형오의 시사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영상편집 : 신민희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