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총선 당시 참여정부 때도 불법 사찰을 저질렀다는 청와대의 반격이 있은 뒤 잠잠했던 시한폭탄이 다시 움직이는 셈입니다.
검찰이 확보했다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추진 지휘체계' 문건을 보면 청와대가 민간사찰과 무관하고 했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듯합니다.
이 문건에 등장하는 이른바 비선라인은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 노사비서관, 그리고 곧바로 VIP 또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이어집니다.
VIP는 대통령을 뜻합니다.
이 문건을 작성한 사람은 진경락 공직윤리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으로, 비선 라인의 신설 목적을 VIP의 국정수행 차질을 타개하기 위해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통상적인 공직기강 업무는 국무총리가 지휘하되, 특명사항은 VIP께 절대 충성하는 친위 조직이 비선에서 총괄지휘한다고 지휘체계를 명확히 했습니다.
'VIP께 일심으로 충성하는 별도 비선을 통해 총괄지휘'한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있고,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왜 이런 비선조직이 필요했을까요?
문건이 만들어진 시기는 2008년 8월로 광우병 촛불 집회 직후입니다.
결국, 촛불집회에 놀란 이명박 정부가 별도의 비밀 조직을 만들어 이명박 정부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사찰했다는 뜻일까요?
문건을 보면 이 비선라인의 첫 번째 타깃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인사들인 듯합니다.
문건에는 노무현 정권 코드인사들의 음성적 저항과 일부 공직자들의 복지부동으로 말미암아 VIP의 국정수행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또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성격을 '전 정권 말기에 대못질한 코드 인사 중 MB 정책기조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인사에게 사표 제출'이라는 문구도 나옵니다.
새 정권이 출범하면 가장 먼저 전 정권에서 임명된 사람들의 사퇴를 종용하는 것은 사실 정치권에서 들으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긴 합니다.
어쨌든 그들을 사퇴시키려면 약점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찰해야겠죠.
그들이 공직자가 아니라 민간인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새 정부의 국정 운영을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불법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위험한 논리가 만들어진 셈입니다.
VIP를 위해서라면 불법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왜곡된 충성심이 발현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궁금한 건 이런 비선 조직의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 내용을 어디까지 보고받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문건에 등장하는 것처럼 최종 보고자는 VIP였을까요?
지난 3월 민간인 불법 사찰 문제가 드러났을 때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은 자신이 몸통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기자회견 내용 들어보시죠
▶ 인터뷰 : 이영호 / 청와대 전 고용노사비서관(3월20일)
- "내가 몸통입니다. 내가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있는 내용을 철저히 삭제하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이 전 비서관은 그러면서 민간인 불법사찰은 현 정부를 음해하기 위한 음모이며, 정치공작이라고 강하게 성토했습니다.
이영호 씨의 말처럼 자신이 몸통이라면 그 몸통 위에 그려져 있는 VIP는 도대체 뭘까요?
진경락 전 과장은 왜 비선 보고라인의 가장 높은 곳에 이영호 비서관이 아닌 VIP라고 적어 놓은 걸까요?
청와대는 역시 관련 내용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BH 하명'이라고 적힌 사찰 문건이 공개됐을 때도 청와대는 사찰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일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건 역시 진 전 과장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문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론과 정치권은 청와대의 이런 주장을 믿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정치권은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진실을 밝히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박지원 민주통합당 비대위원장의 말입니다.
▶ 인터뷰 : 박지원 / 민주통합당 비대위원장
- "이렇게 명명백백한데도 계속 청와대에서는 '노무현 정권 때도 했다' 이런 변명을 하면서 자기들은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은 또 한 번 국민을 분노하게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귀국하면 여기에 대한 응분의 책임, 말씀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민주통합당은 권재진 법무 장관의 사퇴와 함께 이 문제를 다룰 특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새누리당도 청와대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지난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 비리와 각종 의혹에 대해 특검을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 인터뷰 : 이한구 / 새누리당 원내대표(5월10일)
- "국회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곳으로, 잘못된 것은 확실하게 밝히고 바로잡아야 한다”며 “(청와대를) 보호해줄 필요가 없지 않으냐?"
이상일 새누리당 대변인도 논평을 내고 "검찰은 현 정부에서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청와대와의 관련성도 정확하게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이제 민간인 불법 사찰 문제는 검찰에 맡겨둘 수준을 넘어선 듯합니다.
특히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권재진 법무장관이 있는 한 검찰 수사가 제대로 될 수 있겠느냐는 부정적인 여론은 가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관련자들이 혐의를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에서 검찰이 몸통의 실체를 밝히는 것도 한계가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검찰 수사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민간인 불법 사찰의 몸통은 누구겠지'라고 수군대고 있습니다.
이 수군거림이 청와대에도 들릴까요?
어쩌면 대통령이 직접 관여했든, 하지 않았든 오랜 침묵을 깨고 나서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않을까요?
청와대로서는 잔인한 봄을 견디고 있습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 김형오 / hokim@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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