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극장에 가지 않는 사람들
극장은 시티 라이프의 ‘꽃’이었다. 30년 전에도 그랬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더 이상 극장으로 발길을 향하지 않는다. 이제 극장은 사양산업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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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픽사베이 |
대중문화의 정점이었던 영화 보기
시쳇말로 ‘라떼는’ 영화 극장이 최고의 핫 플레이스였다. 1990년대의 이야기다. 아니 영화관을 빼고서는 청춘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논할 수가 없었다. 진짜다. 지금 복기해보면 충무로, 명동, 종로3가에 위치해 있던 대한극장, 명보극장, 피카디리, 서울극장 등은 그 시대 최고의 ‘핫플’임에 틀림없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기 위해 서울극장에서 (업자들이 미리 표를 사두고 관객에게 약간의 웃돈을 받고 파는) ‘암표’를 사야만 했다.
영화가 흥행하면, (불법 복제 카세트 테이프를 판매하는) 리어카에서는 어김없이 영화의 사운드트랙들이 흘러나왔다.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 사라 본의 ‘Love Concerto’ 같은 곡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가 전국적 흥행 궤도에 올랐을 때 극장 앞은 쥐포, 오징어, 문어 등 노점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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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픽사베이 |
1998년, 지하철 2호선 강변역에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가 들어섰다. 한 건물 안에 상영관이 10개 가까이 있었다. 여긴 당시의 진정한 핫 플레이스였다. 개관 당시 이곳에서의 영화 관람 여부가 트렌드를 좌지우지했을 정도였으니까. 이전까지 한국 극장은 하나의 스크린을 가진 단관 극장 시스템이었다. 그러니까 멀티플렉스 시대의 도래는 한국영화 산업의 분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편의 영화가 곳곳의 스크린에서 동시에 상영된다는 것. 이건 분명히 산업적으로 일종의 빅뱅이었다.
멀티플렉스 이전과 이후의 통계들을 찾아보면 확실히 이해된다. 영화 관람객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에서 극장은 줄곧 라이프스타일 트렌드에 있어 지배적 위치를 점해왔다. 시간을 때우든, 데이트를 하든, 사교 모임을 하든 간에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는 대중문화의 정점이었고, 동시에 영화관을 보유한 공간들은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는 불변의 진리였다.
팬데믹 그 이후, 관객이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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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픽사베이 |
팬데믹이 선언됐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이 밀폐된 공간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극장에선 자리를 띄우고 앉았고 마스크는 필수였다. 마스크를 써야 하니 극장 최고의 수입원 중 하나인 팝콘과 음료 판매가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다. 영화 티켓보다도 그런 부가 수익이 극장을 운영하는 데 가장 큰 매출 지점이었으니 극장 산업은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공간을 운영하며 직원을 고용해야만 하는 극장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구조조정도 단행됐다. 극장에서나 팔던 팝콘을 식품 커머스에 도입해 저렴하게 팔기까지 했다. 자구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산업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입었다.
올해 들어서야 팬데믹이 종식됐다. 최근 들어서야 의무였던 마스크를 쓰지 않게 되었다. 관객들은 극장에나 가볼까 생각한다. 그간 영화를 못본 지 꽤 오래된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그러나 그들은 티켓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란다. 팬데믹 전에 1만 원 미만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으니 지금도 그러려니 하고 티켓 박스를 찾았을 거다. 주말 프라임 시간대에 영화를 관람하려면 1인 1만5,000원을 지불해야만 했다. 둘이서 보면 3만 원이다. 여기에 팝콘과 음료를 구매하면 5만 원 정도는 금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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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픽사베이 |
과거에 생각하던 극장이 아니라는 사고가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물가는 고공행진인데, 영화를 관람하려니 꽤 큰 지출이 생겨난다. 영화를 보고 식사, 음주까지 하려니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사람들은 극장에 가는 행위 자체를 아깝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원래 물가란 건 한 번 올라가면 낮추기 어려운 법이다. 이제 영화 관람 가격은 그렇게 고정되었다. 업계 일각에서는 티켓 가격을 내리라고 아우성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산업이 그렇듯 한 번 상승시킨 가격을 단박에 끌어내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영화 극장은 ‘핫플’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곁들여진다.
“OTT 오리지널 무비는 관객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버렸다. 티켓 가격은 비싸졌지만 입장 관객수가 현격히 줄어들며 산업 자체의 하락세는 점차 가속화되고 있다. 극장의 몰락 혹은 추락을 견인하는 원인 중 첫 번째는 비싸진 입장권, 두 번째는 소프트웨어 자체의 문제였다. 이제 더 이상 극장이 핫 플레이스가 아닌 마지막 이유는 다양해진 라이프스타일에도 있다.”
극장만의 스펙타클한 경험 대신 다양한 디바이스로
20세기 말, 21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극장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시티 라이프가 없었다. 일단 영화를 한 편 봐야 긴 주말 시간의 일부가 사용되고, 여기에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곁들이면 됐었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손 안의 모바일을 통해 온갖 (영화를 포함한) 영상 콘텐츠를 자연스럽게 소비할 수 있기 되었기에 그렇다. OTT 플랫폼의 성행은 점차 극장이라는 공간을 핫플에서 선택의 공간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몇 달만 기다리면 모든 영화들이 OTT로 유입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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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픽사베이 |
여기에 더해 극장 개봉을 포기한 영화들은 물론, OTT 오리지널 영화들도 만들어졌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되었을 때만 해도 이에 대한 부정적 의문이 제기도 했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OTT 오리지널 무비는 관객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버렸다.
극장이 더 이상 핫 플레이스가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사람들은 가격 인상을 제기했다. 그런데 말이다. 꼭 가격이 비싸다는 것만 이유로 들 수 있을까? 물론 극장의 가격 인상이 첫 번째 문제로 제기될 만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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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픽사베이] |
두 번째가 바로 극장에서 소비되어야 할 콘텐츠 자체의 문제다. 사람들은 팬데믹 동안 극장에 가지 않으면서 핸드폰, 패드, 모니터 등과 같은 디바이스 사이즈에 굉장히 익숙해졌다. 나만 해도 그렇다. 한때 영화 전문기자의 이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손 안의 모바일 화면으로 영화나 시리즈를 보는 게 그리 불편하지 않다. 이게 어떤 차이냐고 묻는 이도 있을 거다. 전통적 관습상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이라고들 흔히 말한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는 관객에게 스펙터클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판타지를 생산한다고 해왔다. 많은 이론가 및 학자들이 그렇게 말했었던 게 사실이다.
여전히 스펙터클은 영화의 기능 중 최고로 꼽히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관객의 인지구조가 점차 작은 화면에서도 스펙터클을 경험할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탓에 극장의 광활한 스크린이 굳이 필요 없다고 점차 믿게 되었다. 나 역시도 이에 동의하는 바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때문에 최근 아이맥스 상영관 티켓이 웃돈까지 붙어 거래된다지만, 정작 그걸 보고 나오면 굳이 그리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라는 의견이 더 팽배해진다. 시각과 뇌의 인지를 통한 스펙터클에 대한 정의가 시대를 거듭하며 점차 변화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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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픽사베이 |
이런 세상에서 극장에 걸리는 영화 자체의 퀄리티에 대한 문턱도 높아졌다. 사실 <범죄도시 2>의 천만 관객 동원은 이 문턱보다는 팬데믹 종식 직후의 스트레스 해소의 영향이 더 컸다고 생각된다. 이를 제외하고 나면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에 대한 잣대가 굉장히 높아진 것이다. 이제 과거 천만 관객 동원이 되었을 법한 영화들의 흥행 스코어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버렸다. 티켓 가격은 비싸졌지만 입장 관객수가 현격히 줄어들며 산업 자체의 하락세는 점차 가속화되고 있다.
추석 대목에 기대보는 한국영화의 저력
사실 2023년 여름 성수기의 극장가는 앞으로의 영화 극장이 핫플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여느 때처럼 천만 관객 동원 영화가 나오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극장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였기 때문이다. 기대가 컸다. 류승완 감독의 <밀수>가 첫 테이프를 끊고,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바통을 이어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또 함께하는 <비공식작전>과 <더 문>의 활약도 기대했다. 그러나 여름 극장가는 과거와 같지 않았다. 냉담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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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각 영화 스틸컷 |
큰 기대를 걸었던 <밀수>가 현재까지 513만 명을 동원했다. 예상보다 적게 들었다. <비공식작전>은 105만 명을 기록했다. 망했다. <더 문>은 51만 명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금까지 382만 관객을 동원했다(모두 9월23일 기준). 역시 예상보다는 적다. 여름 극장가는 항상 블록버스터로 치열한 전투를 펼치는 장이다. 한국영화 4편 모두 블록버스터 급이었다. 하지만 네 편을 모두 합해봐야 1,043만 관객이다. 이 성적표는 처참하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다. 과거 같으면 <밀수>가 최소 800만 명,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최소 500만 명 이상을 동원했어야 했다. 팬데믹 종식 이후에도 관객이 좀처럼 늘지 않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번 여름 시즌의 분수령을 극장가는 성공적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문턱도 다다르지 못하고 좌초한 셈이다. 이로써 핫 플레이스로서의 극장이라는 명분을 재탈환하지 못할 확률이 커졌다. 올 하반기 한 번의 분수령이 더 있다. 바로 추석 대목이다. 김지운 감독이 연출하고 송강호가 주연을 맡은 <거미집>, 신인 김성식 감독과 배우 강동원이 힘을 모은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하 ‘천박사’), 강제규 감독과 하정우가 손잡은 <1947 보스턴>이 추석 극장가에 불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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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영화 스틸컷 |
업계 관계자들과의 대화에 따르면 그러나 추석 대목 또한 흥행을 기대하기엔 만만치 않아 보인다. 칸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거미집>의 우세를 점치긴 하지만 전체 흥행 판도가 그리 폭발적이진 않을 것이란 예상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편이 모두 힘을 내어 좋은 결과를 한번 만들어주길 기대하는 바도 크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은 영화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핫 플레이라스는 명분은 고사하고, 선택적 공간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될 터이니 말이다.
다양해진 여가 문화...콘텐츠 재고 필요
정리하자면 극장의 몰락 혹은 추락을 견인하는 원인 중 첫 번째는 비싸진 입장권, 두 번째는 소프트웨어 자체의 문제였다. 이제 더 이상 극장이 핫 플레이스가 아닌 마지막 이유는 다양해진 라이프스타일에도 있다. 서두에서 ‘라떼’라며 기술했던 극장의 성수기 시절에는 ‘이것밖에 할 게 없다’는 명제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Z세대 이상의 세대에 속하는 독자들이라면 한번 기억을 반추해보길 바란다. 그때는 영화를 보는 게 여가 생활의 가장 큰 첫 번째였다. 영화 관람을 시작으로 라이프스타일이 전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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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픽사베이 |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렇지 않다. 영화 말고도 시간을 흥미롭고,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다양한 액티비티들이 존재한다. 이력서의 취미 항목에 ‘영화 감상’이라고 쓰는 건 이미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는 그게 대중 예술의 꽃이었기에 그럴 듯해 보이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현대는 그렇지 않다.
일단 팬데믹 종식 이후 최고의 화두는 해외 여행이 되었다. 그것 말고도 시티 라이프 속에서는 숱한 팝업 스토어, 전시, 이벤트들이 새로운 세대의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콘서트도 가야 하고, 각종 페스티벌도 많다. 부수적으로 영화 관람을 돕는 기능으로 OTT까지 가세했다. 그러니 극장은 찬밥이 될 수밖에 없다. 지갑에서 1인 1만5,000원을 꺼내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 그렇다. 그 금액이면 또 다른 핫플에서 식사나 음료를 마시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게 요즘의 소비자 성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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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픽사베이 |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극장으로 관객을 다시금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가격 조정과 함께 콘텐츠에 대한 재고가 필요할 것 같다. 추석 대목에 맞춰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영화 3편을 보면 흐름을 언뜻 유추할 수 있다. <거미집>은 창작 시나리오이고, <천박사>는 웹툰 원작이며, <1947 보스턴>은 실화 바탕이다. 트렌드 같지만 한국영화는 이제 웹 콘텐츠 IP에서 조금 벗어나야 할 때라는 게 내 생각이다.
웹툰의 판타지가 실사 스크린에서 펼쳐지기란 여간 쉽지 않기에 그렇다. 또 과거 실화 바탕도 마찬가지다. 역사 속에도 주연과 조연이 있다. 할리우드라면 조연을 주연으로 끌어올
리기도 한다. 물론 이런 영화 역시 흥행 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기술하고 보면 이제 극장이 우리 시대의 핫 플레이스가 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아니, 더 이상 핫 플레이스가 아닌 게 맞을 것이다.
[글 이주영(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매경DB, 각 영화 배급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9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