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인력으로 연계하고 계속 확장한다
오감 체험, 온라인, 가상현실과 결합하는 공간들
예나 지금이나 나를 둘러싼 공간이 가진 힘은 크다. 그런데 그 공간이 현실과 가상 세계의 합종연횡을 통해 거대한 힘을 키워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바로 ‘공간력’ 시대다.
공간력, 인력·연계력·확장력으로 세분화
최근에 파리에 다녀왔다. 패션위크 취재라는 업무상 출장이었다.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파리라는 도시가 여행자에게 전하는 ‘공간’으로서의 힘은 굉장하다. 팬데믹이 종식된 탓일까? 지난 3년간 그나마 한산하다고 느꼈던 파리는 작금에 밀집된 군중의 혼잡성을 다시금 획득했다. 아무튼 그런 도시에서 쇼핑 말고 무엇을 할까라는 고민을 잠시 했다. 마침 파리에 위치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Fondation Cartier L’Art Contemporain)에서 전시 하나가 열리는 중이었다. 작년 서울에서 열린 전시에서도 꽤 큰 반향을 일으켰던 현대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의 전시가 바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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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까르띠에현대미술재단에서 열리는 론 뮤익 전시 |
숙소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으로 향했다. 론 뮤익의 2023년 신작 두 점이 포함되어 있어 더 의미 깊은 전시였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새로움을 느낀 건 전시나, 작품보다는 그 미술관이라는 공간 자체였다. 파리 시내에 위치한, 굉장히 현대적 건축물로 세워진 공간을, 마치 숲속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하는 오솔길과 숲으로 둘러쌌다는 것. 그래서 이 미술관은 까르띠에라는 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구매할 여력이 되지 않는(패션지 편집장인 나조차도 그 소비자 군에 속한다) 이들에게까지 브랜드의 영향력을 설파한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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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 뮤익 전시 |
맞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 하는 건 바로 ‘공간이 가진 힘’, 이른바 트렌드 키워드로서의 ‘공간력’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간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힘은 강렬하다. 역사적 관광지를 어디에 가든 들려보려 하고, 핫 플레이스라면 SNS 업로드를 위해 사족을 못쓰고 달려간다. 어디가 뜬다고 하면 몇 시간을 대기하던 입장하려 노력하고, 저기가 유명하다고 하면 기를 쓰고 가보려 애쓴다. 이게 현대 사회 소비자의 특징이다. 그러니 ‘공간력’이라는 키워드가 라이프스타일 트렌드의 특징으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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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 뮤익 전시 |
그렇다면 공간력은 어떻게 구분될까? 솔직히 말해 공간이라는 요소는 우리네 일상의 모든 부분과 접점을 이룬다. 보호처 혹은 피신처로서의 구조물을 만들기 시작한 이래로 형태를 지닌 공간은 인간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쳐왔다. 더욱이 과거로부터 인류는 공간을 예술의 한 부분으로 치부해왔다. 그랬던 공간을, 향유하는 인간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고, 특히 상업적이고 경제적 측면을 고려하며 소비자라는 인간에게 시대적 잣대를 적용했을 때 공간(空簡)은 ‘힘(力)’을 가지기 시작한다.
인력: 공간 자체의 힘으로 사람을 끌어당기고 머물게 하다
현대적 용어에서 공간력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매년 마케팅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책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도 ‘공간력’의 중요성이 언급된다. 이 공간력은 인력, 연계력, 확장력이라는 미세 범주로 세분화된다. 첫째로 꼽히는 인력은 역사적으로 현재까지 유효한 ‘공간 자체의 힘으로 사람을 끌어당기고 머물게 하는 힘’이다. 물론 여기에도 다양한 인자들이 작용하며 그 힘을 생성해낸다.
예를 들어 우리네 ‘경복궁’을 떠올려보자. 그 공간에는 왕조실록이라는 우리의 뿌리, 역사성을 담보한 전통적 가치, 현대적 시선으로 평가한 예술성 등에 한국의 전통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정부의 오랜 노력까지 함께 곁들여져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시선이 고루 덧씌워지며 오늘 날의 경복궁은 우리뿐만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를 여행하는 이들을 끌어당기는 공간력을 지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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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픽사베이 |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시작된 현대적 키워드로서의 ‘인력’에 의한 공간력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단지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에 대한 의문 제기가 이뤄진 것을 제외하곤 말이다. 바로 ‘소비자’다. 이제 소비자는 인류 전체를 뜻하는 범용적 언어다. 물물교환 시대를 뛰어 넘어 뭔가를 사지 않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력의 첫 번째 요소는 대부분 오프라인에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인력에 의한 공간의 힘이 극대화되기 위한 요소를 꼽는다. ‘둘러보기’ ‘감각적 쇼핑’ ‘인적 서비스’가 바로 그 핵심이다.
현대적 공간의 힘은 소비자가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주는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직접 제품의 물성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물건을 선택하기 위한 도움을 얼마나 적절하게 받을 수 있는가. 이건 서비스라는 단어로도 대체될 수 있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할 때 고가의 제품이 있다는 이유로 내 주변을 전담 마크하듯 졸졸 따라다니는 직원을 만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공간 자체보다 그 사람에게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물론 최근에는 이런 상황들의 발생 빈도가 확연히 줄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
연계력: 오프라인과 온라인, 가상과 현실의 상호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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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픽사베이] |
공간의 힘을 피력하는 두 번째 요소는 연계력이다. 소비자의 세대가 변화하면서 온라인의 영향력 자체가 거대해지고 있다. 새로운 소비자들은 뭔가를 사러 이동까지 하며 매장에 직접 가는 것 자체를 귀찮아 한다. 그러니 온라인 자체가 새로운 공간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의 연계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제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각각 독립 공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상호 교류 탓에 인력을 기반으로 공간력을 내뿜는 현실 공간에서의 변화 역시 꽤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오프라인 공간의 장점. 즉, 멋있거나 아름다워야 하고, SNS를 위한 포토존이 존재해야 하며, 그곳에 들어갔을 때 구매 말고도 어떤 놀이의 행위까지 담보되어야 하는 장점 위에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하는 온라인의 가속 경험이 덧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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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픽사베이 |
굳이 쇼핑이 아니더라도 최근 많은 전시에서 QR코드를 이용한 도슨트, 혹은 그 작가의 작품 세계 확장을 경험하게 하는 장치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은 지난해 로스엔젤레스에 자신들의 최초 오프라인 매장 아마존 스타일을 열었다. 여기에 가면 옷에 붙어 있는 태그에 부착된 QR코드를 통해 마치 온라인 쇼핑을 하는 듯한 경험을 가능케 한다. 실제 옷을 보면서 (매장에 부재한) 제품의 다양한 컬러를 확인하고, 피팅 모델이 입고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스타일과 사이즈를 확인할 수 있다. 아마존은 이와 같은 현실 공간에서의 가상 공간 체험을 ‘매장 내 쇼핑 경험의 재창조’라고 칭한다.
지난 달 호주에 있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시드니에 가서 중학교 1학년 남자 하나와, 초등학교 5학년 쌍둥이 자매 조카들을 만났다. 알파 세대로 불리는 미래의 또 다른 소비자 핵심 군이다. 한 녀석은 틈만 나면 메타버스 플랫폼인 ‘로블록스’에 접속해 게임과 채팅을 했고, 조금 더 어린 초등학생 자매들의 패드는 항상 유튜브에 접속되어 있었다. 그들이 시청하는 것은 대부분 수십 초 내외의 세로형 쇼츠 영상이었다. 한 손으로 끊임없이 패드 화면을 쓸어 넘긴다. X세대 소비자 군에 포함되어 있는 내게, 그들의 그런 디지털 디바이스 활용도는 잠깐의 쇼크를 전달했다. 말로만 듣던 디지털 세대, 심지어 알파세대라 불리는 신인류의 디지털 액티비티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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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픽사베이] |
확장력: 메타버스 내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이쯤되면 공간력의 마지막 범주인 확장력이 등장한다. “최근 들어 공간의 개념이 단순한 온·오프라인의 이분법을 넘어 현실세계의 재반영인 제3의 공간, ‘메타버스’로 확장되고 있다. 공간경험을 메타버스로 확장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메타버스에 가상현실 매장을 개설해 현실의 오프라인 매장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많은 미디어들에서 메타버스를 두고 이렇게들 이야기한다. 일단 메타버스는 플랫폼을 떠나서 일종의 가상현실 공간으로도 언급된다.
팬데믹 기간 동안 내가 몸담고 있는 패션 산업 신에서는 거리 두기로 인해 단절된 소비자와의 간극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그 결과가 바로 AR 또는 VR 등을 통한 가상 공간에서의 현실 공간 체험이었다. 직접 눈 앞에서 볼 수 있었던 컬렉션 런웨이를 가상 공간으로 옮겨 체험하게 하거나, 또는 매장의 제품들을 온라인 상에 마련한 특별한 공간에서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든 게 그것이다. 사실 이 방식은 두 번째 요소로 언급했던 현실과 가상의 연계의 일환임과 동시에 이는 현실 공간이 가상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확장력의 일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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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루이비통 본사의 가상현실 부스 |
몇 년 전부터 이 확장력의 범주를 더욱 더 확장시킨 건 새로운 세대 소비자군들의 놀이터인 메타버스 플랫폼이다. 앞서 이야기했든 MZ세대 이후 차기 소비자 핵심 주자로 알파 세대를 논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지 않던가. 전 세계의 많은 아이들은 메타버스 로블록스 또는 제페토에서 많이 논다. 일단 게임이 그 놀이의 기반이긴 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게임이라는 메타버스 플랫폼 내 섹션에서 다른 많은 범주로 확장된다. 게임을 하다가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 받는다. 그러니까 메타버스 내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친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채팅방은 일종의 커뮤니티가 되고, 그 그룹은 자신들의 공간을 꾸미기도 한다.
그러다 그룹 멤버들은 메타버스 속에 마련된 또 다른 공간을 소개하고, 함께 들르기도 한다. 그 속에는 명품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가상공간 스토어 또는 숍들이 팝업 형태로 생겼다 사라지기도 한다. 메타버스 사용자들은 그곳에서 소비자가 되어 명품 브랜드의 핸드백(실제 핸드백은 아니다)을 구매하기도 하고, 어떤 식음료 브랜드의 특정 제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심지어 트레비스 스캇과 같은 유명 힙합 아티스트의 콘서트를 그곳에서 보기도 한다. 이런 행위 자체가 미래 소비자로 꼽히는 알파 세대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마케팅 전략이다. 그렇게 경험한 이들이 실제 구매 고객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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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픽사베이] |
이제 전통적 공간의 개념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붕괴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공간력이라는 키워드는 현실 공간을 주력으로 한다. 하지만 그 현실 공간 자체에 온라인이 입혀지고, 메타버스를 통한 접근까지도 허용되고 있다. 패션위크를 취재하기 위한 파리 방문 이후, 다른 패션 브랜드의 컬렉션 쇼를 취재하기 위해 다시금 방문한 파리는 짧은 일정이었으나 인파로 북적였다. 예전 파리의 명성을 완벽하게 되찾은 시기인 셈이다. 한가지 썰을 풀자면 그곳에서 나는 핸드폰을 도둑맞았다.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앉을라치면 소지품을 각별하게 조심해야 한다는 유럽 관광의 첫 번째 수칙을 망각한 덕분이다. 아무튼 내 몸처럼 딱 붙어 있던 모바일이 곁에서 사라지는 순간 현대인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현실 공간에 존재하지만, 그 현실에서의 존재를 가능케 해주는 건 디지털 공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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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픽사베이] |
언어도 지리도 불확실한 여행자에게 사라진 모바일은 현실에서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든다. 막대한 공간력을 행사하는 핫 플레이스를 찾아갈 수도 없다. 그곳에 도착했다 한들 온라인을 통해 더 큰 경험을 전해주는 연계력을 느낄 수도 없다. 모바일 속에 담긴 구글 맵의 길 찾기조차 실행할 수 없기에 공간의 확장력은 언감생심 경험할 꿈도 꾸지 못한다.
굳이 스마트폰 분실이라는 근래의 개인적 경험을 글 속으로 끌어들인 건, 이 글의 주제인 ‘공간력’이 얼마나 온라인과 과하게 연계되고, 확장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사례다. 우리는 공간의 힘을 현실에서만 체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현실을 바탕으로 우린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을 온라인과 가상세계를 통해 경험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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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픽사베이] |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 줄을 이겨내고 입성한 현실 핫 플레이스의 경험은 결코 그것으로만 종결되지 않고 SNS 업로드를 통해 다시금 확장된다. 그
리고 그 확장력을 통해 다시금 인력이 창조한 공간으로 재순환된다. 지금 우리 라이프스타일 속에서 공간이 가진 힘은 짧은 글로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다. 그게 공간의 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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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주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사진 이주영, 픽사베이,
그래픽 포토파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9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