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김정희 사무총장 |
재난이 일상화된 시대다. 태풍, 홍수, 산불, 폭염 등 재난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피해 규모도 날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 여러 개의 재난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복합재난’의 양상도 뚜렷하다. 재난 피해의 복구와 재난을 당한 이웃들을 도와 일상을 회복하는 일의 중요성도 그만큼 커졌다.
우리나라 재난구호 활동의 중심에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라는 민간단체가 있다. 1961년 설립돼 올해로 62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유일의 법정 구호단체다. 사단법인 한국언론인협회는 매년 각 분야에서 우수한 전문성과 리더십을 발휘해 미래 발전에 공헌한 사람을 선정해 상을 주고 있는데, 지난해 12월 이 단체의 김정희(59) 사무총장에게 ‘2022 올해를 빛낸 한국인 대상’의 '재난구호활동 대상'을 수여했다. 한국언론인협회는 "산불과 수해 등 각종 재난·재해 피해가 커지는 상황 속에서 재난 피해 이웃을 돕기 위한 사회적 동참에 앞장섰으며, 특히 현장 맞춤형 구호 활동을 펼침으로써 이재민의 빠른 일상 회복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며 김정희 사무총장의 수상 선정 배경을 밝혔다.
지난 2018년 6월 김 총장 부임 이후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가 이룩한 성과는 '숫자'로 증명된다. 오랫동안 모금액 부족에 허덕여온 상황에서 벗어나 2019년 강원산불 때 370억 원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연간 모금액이 1,000억 원대가 훨씬 넘는 비약적 성과를 거뒀다. 희망브리지의 '인지도'도 높아져 재난이 일어나면 성금 기부처로 희망브리지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희망브리지는 공익법인 평가기관인 '한국가이드스타'가 매년 하는 회계 투명성과 신뢰성 평가에서 4년 연속 최고점을 받았다. 동해안 산불 구호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4월19일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새해를 맞아 김정희 사무총장을 만났다.
- 원래부터 구호 전문가로 활동했는가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2011년부터입니다. 1961년 창립된 전국재해구호협회가 50돌 생일을 맞는 해였습니다. 창립 50주년 기념행사 개최 문제로 고심하던 최학래 당시 협회 회장께서 "50주년기념사업추진단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왔습니다. 최 회장은 원래 한겨레신문 사장 출신인데, 역시 한겨레 출신인 저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홍보컨설팅 회사를 운영한 경험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김정희 사무총장의 원래 출발은 기자였다. 대학 졸업 뒤 동아일보 출판국 등에서 일하다가 1988년 창간된 한겨레신문에 편집 경력기자로 옮겨 일했다. 그러다 이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일하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면서 한겨레를 떠났다. 그 뒤 시사저널사에서 발행하는 잡지에서 편집기자, 편집부장 등으로 일했는데 그때 취재부장, 편집국장이었던 이가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으로 유명한 김훈 작가다. 그때 맺은 인연이 지속돼 김훈 작가와는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고 있다.
↑ ▲1993년경 시사저널사 간행 아래에서 둘째 줄 오른쪽 두 번째가 김훈 당시 취재부장, 넷째 줄 오른쪽 두 번째가 김정희 사무총장 |
그의 인생행로는 1999년에 다시 바뀐다. 2000년 밀레니엄 행사를 앞두고 발족한 대통령직속 ‘새천년준비위원회’의 홍보팀장으로 발탁됐다.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었다.
-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어령 장관과 각별한 인연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지식의 해박함과 창의적 발상에서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는 분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지요. 이 장관님의 샘솟는 아이디어와 지시사항을 따라가느라 새천년준비위 사람들은 모두 허덕였어요. 그런데 저는 이 장관님의 말에 담긴 인문학적 맥락과 핵심을 간파해 실행에 옮기는 일이 그처럼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이 장관님은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우리 조직에 한 명밖에 없다"는 말도 자주 하셨다고 해요. 돌아가실 때까지 저의 가장 든든한 응원자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셨습니다. 2000년 초 새천년준비위원회가 임무를 끝내고 해산된 뒤 '2002년 월드컵조직위원회'에서 일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며칠 동안 새 일터로 출근했으나 이어령 장관이 안 계신 조직에서 일할 마음이 도무지 나지 않아 그만두었습니다. 차라리 새천년준비위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사업을 해보리라 결심하고 홍보기획 회사를 차렸습니다. 주로 정부정책 컨설팅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는데, 한때 직원이 2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사업이 번창하는 듯도 했지만 모 기업의 홍보를 맡아 세금계산서까지 떼어주며 일하고서도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등의 불운이 겹치면서 결국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해구호협회 50주년 기념사업추진단장 제안을 받은 시점은 사업을 그만두고 한동안 휴지기를 보내던 때였습니다.”
↑ ▲ 2006년 중앙일보 고문 시절의 고 이어령 문화부 장관과 담소하는 모습 |
- ‘희망브리지’라는 명칭도 김 총장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전국재해구호협회라는 명칭이 너무 밋밋하고 임팩트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내려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것이 '나눔을 통해 희망으로 가는 가교'라는 뜻의 '희망브리지'입니다. 상당히 성공적인 브랜드 네이밍이 됐습니다.”
- 기념사업추진단장 일을 하면서 구호 분야에 관심이 생긴 것인지요.
“재해구호협회 50주년 기념사업 일을 하다 보니 구호 활동에 대한 애정과 이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의욕이 솟아났습니다. 재난을 당한 불행한 이웃들을 돕는 게 무엇보다 값진 일이고 제 적성에도 맞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2012년에 기존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면서 새로 사무총장을 뽑는다고 해서 공모 응시 서류를 냈는데 떨어졌어요. 같은 한겨레신문 출신이 회장-사무총장을 맡는 게 무척 부담스러웠으리라 생각합니다.
- 경력을 보면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비서실장’이라는 매우 독특한 이력이 있는데요.
”2013년 봄에 최학래 회장님이 '김진호 예비역 대장의 자서전을 한번 써볼 의향이 없느냐'는 연락을 해오셨어요. 김 장군님은 ROTC 출신 첫 합참의장으로 제1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맹장인데, 최 회장님과는 막역한 사이였어요. 김 장군님한테서 자서전 대필작가를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최 회장께서 저를 추천한 것이지요.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여성이 예비역 육군대장의 자서전을 써보라는 권유 자체가 파격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응낙했고 몇 개월 동안의 산고를 거쳐 완성한 책이 <군인 김진호>입니다. 애초 '여성 작가가 군대 이야기를 잘 쓸 수 있을까' 다소 불안감을 느꼈던 김진호 장군께서도 저를 아낌없이 신뢰하게 됐지요. 저 역시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김 장군님을 깊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김 장군께서는 우여곡절 끝에 2017년 8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에 당선됐습니다. 그리고 저한테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하셨습니다.“
- ‘군미필 여성’이 향군 비서실장으로 간 셈인데 주변 반응이 궁금합니다.
”재향군인회는 잘 아시다시피 전역한 장군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별 하나 출신은 발에 차일 정도이고 별 둘, 별 셋의 쟁쟁한 예비역 장성들도 많습니다. 이런 곳에서 ‘군 미필자 여성’이 회장 비서실장을 맡는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파격 중의 파격이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김 장군의 권유를 끝까지 뿌리칠 수는 없었습니다. 재향군인회에서의 근무는 그동안 전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향군은 군 출신 특유의 규율, 기강, 형식, 의전 등을 무척 중시하는 조직입니다. 작은 행사를 하나 치르더라도 꼼꼼한 시간 계획은 물론이고 각종 돌발 상황을 예상한 세밀한 사전 시나리오까지 준비하는 게 그곳의 문화였습니다. 이런 업무 경험은 뒤에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사무총장이 되고 나서 큰 도움이 됐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향군은 고루한 의식, 틀에 박힌 형식주의 등 개선해야 할 점이 많았습니다. 향군 조직에 민간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했어요. 다행히도 향군의 장성 출신 간부들은 ‘군미필 여성 비서실장’이 씩씩하게 일하는 모습을 무척 신기해하면서도 저의 업무 추진 솜씨와 능력을 인정하고 잘 따라주었습니다. 물론 김진호 회장께서 든든한 뒷받침을 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 그래도 향군 안에서는 만만찮은 저항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향군에서 일하는 동안 가장 공을 들인 것은 극단적으로 우 편향 된 조직의 분위기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군 출신 인사들의 모임이라는 특성상 향군은 ‘안보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전통적으로 강한 우파 성향인데 ‘태극기 부대’의 주력으로 활동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향군의 극우파 성향을 누그러뜨리고 ‘안보와 평화’의 두 축을 동시에 추구하는 조직으로 궤도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김진호 회장을 설득했고 다행히 유연한 사고를 갖춘 김 회장도 이런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남과 북이 군사적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한 2018년의 ‘9·19 남북군사합의’에 대해 재향군인회가 이례적으로 환영 성명을 발표한 것 등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향군 내부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극우 유튜버들이 김진호 회장 자택 앞에 며칠씩 진을 치고 김 회장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지요. 그러나 김진호 회장께서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안보와 평화의 두 축으로 함께 가야 한다’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간직한 신조였습니다.
- 김진호 장군은 지난해 9월 향년 81세로 별세했는데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김 장군이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와 향군이 33억 원 어치의 마스크를 불법 거래했다’는 어느 언론매체 보도의 누명을 벗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점입니다. 제가 ‘향군회장 비서실장’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김진호 장군에게까지 누를 끼친 것에 죄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 보도의 허구성을 끝까지 밝혀내 희망브리지와 고인이 된 김진호 장군의 누명을 벗겨 드리려 합니다.”
이어령, 김진호, 최학래. 이 세 사람은 김정희 총장의 삶의 길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인 듯싶다. 흥미로운 점은 세 사람의 이념적 성향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념의 차이는 아무런 장애가 아니라고 김 총장은 말한다. “깊은 신뢰와 사랑, 믿음이 이념보다 훨씬 앞서는 가치입니다. 저 역시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사무총장을 맡은 뒤 ‘재난 구호에는 여도 야도, 진보도 보수도 없다’는 것을 지론으로 삼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 ▲ 재난 현장에서 이재민을 만나 위로를 전하는 김정희 사무총장 |
- 본격적으로 협회 이야기를 해보았으면 합니다.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와 저는 인연이 없나 보다 생각했는데 2018년에 다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전임 사무총장이 물러나면서 후임자를 뽑는 데 응모했습니다. 김진호 회장이 화를 내면서까지 만류했지만, 이제는 향군과 ‘헤어질 결심’을 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치열한 면접시험 등을 거쳐 이번에는 다행히 총장에 선발됐습니다. 그 사이 희망브리지 회장은 송필호 회장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 2012년에 사무총장에 응모했을 당시 희망브리지 안에서 김 총장 기용을 반대하는 연판장이 돌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요.
“2012년 사무총장에 응모할 무렵 일부 희망브리지 직원들 사이에 저를 반대하는 연판장이 돌았다는 이야기는 저도 어렴풋이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연판장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가 사무총장이 된 뒤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연판장은 저를 “부도덕한 인물”로 규정하고 사무총장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부도덕한 인물’의 증거로 제시한 내용이 엉뚱했습니다. “법인카드로 ‘마켓오’에서 생필품을 사고 ‘아모레퍼시픽’에서 화장품을 산 사실이 법인카드 영수증에서 확인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켓오’는 웰빙 음식을 표방하는 레스토랑이고, ‘아모레퍼시픽’은 설록차 등으로 유명한 서울 인사동의 ‘아모레퍼시픽 오설록 티하우스’ 카페입니다. 50주년 기념행사 업무 진행차 외부인사들을 만난 곳인데, 마치 법인카드로 마켓에서 쌀을 사고 얼굴에 바를 화장품을 산 것으로 둔갑해버린 것이지요.
- 많이 억울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었지요. 희망브리지 일부 직원들이 저의 사무총장 기용을 극구 반대한 표면상의 이유는 ‘부도덕’이지만, 실제 이유는 제가 만든 <전국재해구호협회 발전 방안 보고서>와 깊게 연관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념사업추진단장 일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그동안의 관찰과 분석을 토대로 전국재해구호협회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모금 활동 강화에 있다고 보고, 이를 위해 조직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가 등을 담은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최학래 당시 회장에게만 보고한 것이어서 내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직원을 가차없이 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더라”는 등의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제가 사무총장으로 오면 조직 혁신의 태풍이 몰아칠 것으로 예상한 일부 직원들이 극력 저지에 나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를 ‘부도덕한 인물’로 몰아가려 했는데, 엉뚱하게 ‘마켓오’와 ‘아모레퍼시픽’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법인카드를 부적절하게 사용했다고 헛다리를 짚어 악의적인 연판장을 작성한 것이지요.“
사실 재협뿐 아니라 ‘오너’가 없는 조직을 살펴보면 비슷한 특성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몇 년간 임기제로 일하고 가는 회장이나 사무총장은 그냥 ‘손님’(客)일 뿐이고 조직의 진정한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좋게 말하면 강한 ‘주인 의식’이지만, 실제로는 외부인사에 대한 강한 배타성과 변화에 대한 거부심리가 짙게 깔려 있다. 혁신이라는 단어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기제 간부의 도덕적 흠결을 들춰내 끌어내리려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대부분의 임기제 간부가 조직 혁신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칫 잘못하면 벌집을 쑤시는 꼴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재협에서도 나타난 셈이다.
↑ ▲ 재난 현장에서 구호 활동을 하는 김정희 사무총장 |
- 총장으로 부임해서 본 희망브리지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여러 면에서 부진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모금 실적은 다른 구호기관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조직의 대중적 인지도도 매우 낮아 희망브리지는 단체가 어떤 곳인지 아는 국민도 거의 없었지요. 모금액은 적고 자연재난 시 피해 이웃에게 지원해야 하는 의연금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 이런 상태가 지속하면 조직의 생존 여부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게다가 NGO 조직의 특성상 다른 일반 회사들과는 달리 성과 위주의 인사 평가나 내부 경쟁 문화도 정착돼 있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관성적으로 일해 온 타성이 몸에 배어 있는 느슨한 조직이었고, 근무연한이 긴 직원일수록 이런 경향이 심했습니다. 물론 상황이 완전히 비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대다수 직원은 성실하고 일에 대한 열의와 의욕도 충만했습니다. 제대로 계기만 주면 확연히 다른 조직으로 탈바꿈할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연판장 사건에서 보듯이 재협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만만치 않은 과제였을 텐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에 세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첫째, 모든 직원을 포용해 함께 즐겁게 일하는 조직을 만든다. 둘째, 조직의 혁신은 서두르지 않고 최대한 신중하고 치밀하게 추진한다. 셋째, 도덕적 윤리적으로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며 꼬투리 잡힐 일을 하지 않는다. ‘마켓오’와 ‘아모레퍼시픽’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누가 언제 총장의 등에 비수를 꽂을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리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재앙’을 피해갈 수 없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작정하고 덤벼들면 화를 피하기 어려운 법이지요.“
- 김 총장 부임 뒤 많은 사람이 퇴사했고, 이것이 김 총장 때문이라는 비판이 있는데요.
”총장으로 취임한 뒤 몇 달이 지나면서 몇몇 직원이 자발적으로 퇴사하겠다고 나왔습니다. 주로 연판장 작성을 주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사이동에서 최대한 예우를 하면서 포용 책을 폈고, 개별 면담을 통해 퇴사를 만류도 해보았으나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습니다. 신임 총장 체제 아래서는 더는 조직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없다고 느끼는 듯했어요. 한 직원은 정기 인사에서 부서가 바뀌자 그동안 자신이 해온 일 외의 다른 업무는 맡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표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퇴사한 사람들의 자리에는 속속 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공채로 들어와 업무를 대신했습니다.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있던 나이 든 직원 중에는 유능한 젊은 인력과 경쟁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퇴사를 결심한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조직 변화가 진행됐습니다. 어쨌든 오랫동안 정체돼 있던 조직에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 자발적 퇴사 말고 징계해고 조처를 받고 회사를 떠난 직원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2021년 봄 김아무개씨라는 직원이 자신의 부인이 운영하는 분식점에서 일하는 젊은 아르바이트 여성에게 전지가위를 휘두르다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풀려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희 협회는 애초 그런 사건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 직원이 계속 합의를 강제 종용하고 집 주변을 맴도는 것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저희도 사건을 인지하게 됐습니다. 사건의 당사자인 직원에게 그런 사실이 있는지를 공식적으로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왜 회사가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려 하느냐”는 것이었어요. 어떤 회사든 직원이 밖에서 품위를 심각하게 손상하고 회사의 명예와 신뢰에 타격을 가하면 그에 합당한 내부 징계를 받게 돼 있지 않나요. 그런데 그 직원은 “회사가 직원의 사생활을 청문할 권한이 없으므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며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사가 계속되자 “1억 원을 주면 나가겠다” “피해자와 합의를 봤다”는 식으로 주장해 협회는 해당 직원을 대기발령하고 징계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 그 즈음에 언론에서 재협과 김 총장에 대한 비판 기사가 쏟아졌는데요.
“맞습니다. 직원에 대한 징계 절차가 시작되면서 갑자기 몇몇 언론이 협회와 저에 대해 융단폭격식 공격을 하고 나섰습니다. 한 유튜버가 재협 직원들의 퇴사 사태 등을 거론하며 공격의 포문을 연 데 이어 한 일간지 자회사에서 발행하는 매체가 거의 한 면을 할애해 융단폭격을 가했습니다. 제가 재협 전체 회의에서 직원 김씨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채 “국민 성금으로 급여를 받는 우리 협회에서 어떻게 이런 행동이 나올 수 있는가”라며 강한 어조로 실망과 분노를 표시한 것이 ‘폭언’으로 둔갑하는 식이었습니다. 보도 내용이 오보임을 일일이 해명했으나 소용이 없었어요. 연이어 두 차례나 더 기사를 쓰더라고요. 다른 일간지는 이런 내용을 모두 기정사실화해서 협회와 저를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습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사나운 소낙비가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 당시에 퇴직한 직원들도 언론을 통해 김 총장과 재협을 비난하지 않았나요.
”언론과의 익명 인터뷰를 통해 저를 맹비난했습니다. 사실 연판장 작성 등에 참여했다가 퇴직한 직원들이 좋은 감정을 갖고 회사를 떠났을 리는 만무하지요. 스스로 회사에서 걸어나오긴 했지만, 저에 대한 악감정이 가슴에 깊이 남아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난도 모두 사실 관계와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시누이가 없는데도 “직원들에 대한 생활예절 교육 강사를 총장의 시누이를 시켰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한 일간지 기자는 그 기사를 그대로 받아 칼럼에서 ‘시누이’를 ‘지인’으로만 바꾸어 “협회 사내 교육도 총장 지인이 맡았다”고 비난했어요. ‘시누이’가 아니었음을 알았으면 안 쓰는 것이 언론의 정도인데, ‘지인’이라는 단어를 끌어다 악의적으로 비난한 것입니다.
- 이런 언론 보도 이후 행정안전부가 재협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행정안전부가 즉각 사무검사에 착수했습니다. 8명의 감사 인원을 투입해 앞선 2년간의 협회 모든 자료와 문서를 제출받아 일주일 넘게 강도 높은 종합검사를 했습니다. 일부 매체 등에서 보도한 직원사직 종용, 업무추진비 부당 사용, 직원 주차비 개인 전용, 코로나 성금 중 모집경비 부당 사용 등을 ‘조사 대상 비리’라며 이 잡듯이 뒤졌습니다. 결과는 모두 ‘근거 없음’이었습니다. 단지 취업규칙 변경 신고 미이행, 고성산불 현장에 투입된 아르바이트 일용직에 대한 근로계약서 미작성, 의연금 사업결산서 제출 지연 등 사소한 행정절차 미비점에 대한 지적만 나왔을 뿐입니다. 기사에서 언급한 내용이 모두 사실과 동떨어졌음이 역설적으로 행안부 사무검사로 확인된 셈이지요.”
- 언론의 갑작스러운 공격이 직원 김씨와 연관돼 있다고 보는가요?
“재협의 대다수 직원은 여러 정황에 비추어볼 때 언론보도의 배후에는 그 직원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직원이 징계해고 위기에 처하자 재협 조직과 총장을 무력화시키기 평소 친분이 있던 기자를 통해 언론 플레이를 했다는 이야기지요.”
그 직원은 언론의 공격과 무관하게 결국 그해 8월 징계해고됐다. 배우자가 운영하던 가게의 직원을 흉기로 폭행한 혐의, 직장 내 괴롭힘 행위, 그리고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뒤 자신이 사용하던 회사 PC를 포맷해 그동안의 업무자료를 삭제해 회사의 재물을 손괴하고 업무를 방해한 점 등이 인정돼 징계위원들의 만장일치 결정으로 해고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 그 뒤로도 언론 매체의 공격이 계속되지 않았습니까.
“이듬해 이번에는 다른 매체가 나섰습니다. 6개월간 무려 4차례에 걸쳐 재해구호협회와 총장에 대해 그야말로 융단폭격을 가했습니다. 보도의 핵심은 “희망브리지가 재향군인회와 33억 원어치의 마스크를 불법으로 거래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희망브리지는 물론 재향군인회가 직접 나서서 “그런 사실이 없다” “국가보훈처의 철저한 지도 감독을 받는 향군이 그런 불법 거래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해명했으나 해당 매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 행정안전부는 그때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재해구호협회는 감독관청인 행안부의 정기적인 사무검사를 받는 것은 물론 의연금품 배분, 재해 현장 구호 작업, 회계 감사 보고 등 모든 업무를 행안부와 일일이 협의해서 진행합니다. 그렇지만, 행안부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재협을 ‘완벽한 산하기관’으로 만들고 싶어해 왔습니다. 재난 발생 시 의연금 집행 액수와 시기 등을 정부 뜻대로 결정하고 싶은 것은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똑같습니다. 행안부는 그런 방향으로 관련 법령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되풀이해왔는데 제가 이를 완강히 저지했지요. 아마 제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협과 제가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으니 지금이야말로 손쉽게 법령을 개정할 좋은 기회라고 여길 법도 합니다. 사실 이런 프레임은 이미 전임 총장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정식 절차를 거쳐 연임된 사무총장을 ‘어금니 아빠 사건’에 빗대 “셀프 채용”이라고 몰아붙이고, 정부 출연금이나 지원금을 받지 않는 재협을 공공기관으로 지정하려 하는 등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런 공격 프레임이 다시 한번,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 일부 국회의원들도 재협에 압박을 가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여당의 몇몇 의원들이 나서서 의원입법 형태로 법령 개정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한편으로 행안부를 통해 재협에 엄청난 양의 자료를 계속 요구해왔습니다. 저희가 파악하기에는 명예훼손 혐의로 재협에 고소를 당한 기자들이 평소 친분 있는 국회의원실을 동원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재협의 모든 자료를 확보해 뒤져보면 공격할 소재를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심지어 한 국회의원 비서관은 해당 의원과 재협 회장이 만난 자리에서 “(명예훼손 소송으로 제소당한) 기자들을 봐달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 언론, 행안부, 국회를 상대하느라 업무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정말 지옥 같은 나날이었습니다. 끝없이 몰려드는 공격의 파고가 멈출 줄을 모르더군요. 이런 고난 속에서 재난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았고, 강원·경북 지방 산불, 서울과 수도권 집중 호우 등 재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끝없이 몰려왔어요. 매일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나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과중한 업무는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게 돼 있다. 모든 것을 잊고 일에 몰두하는 것이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실제로 이런 속에서 희망브리지의 실적은 비약적으로 치솟았습니다. 코로나 사태에서는 모금단체 중 가장 많은 1023억 원을 모금했고,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 등의 대형 산불 사태 때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기부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
↑ ▲ 2022년 제11호 태풍 ‘힌남노’ 피해 지역에서 식사 지원 및 집수리 봉사 활동을 하는 김정희 사무총장 |
재해구호협회는 자신들을 공격한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재협이나 김 총장으로서는 억울한 판결이겠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재협의 패배‘가 아닐 수 없다. 재협과 이들 언론과의 소송은 내용이 매우 방대하고 복잡해 제3자가 이렇다저렇다 단언을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재협 쪽의 항변을 귀 기울여 들여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 법원의 기각 결정으로 재협이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된 게 사실 아닌가요?
”법원이 기각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우리 법원은 언론의 명예훼손 보도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명예훼손적인 보도를 했더라도 그 보도가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헌법상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위법성 조각사유’를 폭넓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언론보도 피해 소송에서 원고가 패하면 해당 언론 쪽은 자신들의 보도가 모두 옳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송을 당했던 기자들이 “그것 봐라. 내 보도가 모두 맞지 않았느냐”고 주변에 말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억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 해당 언론의 보도가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진실을 추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보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보도 과정에 ‘사적 감정’이 개입됐고 ‘진실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등한히’ 했다고 봅니다. 우선 주목할 점은 해고된 직원과 기자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소송 당사자인 어떤 기자는 징계 해고당한 직원이 저희를 상대로 낸 해고무효 소송에서 탄원서를 제출해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예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 안팎을 취재하면서 알게 되었고 그 후로도 재난, 안전 관련 기사를 쓸 때 그를 인용하는 등 알고 지내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현장에서 재해 경험을 두루 쌓은 봉사 정신과 이타주의로 똘똘 뭉친 재난구호 전문가를 전국재해구호협회가 해고한 배경을 재판부가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탄원서에 썼습니다. 그 직원은 연약한 여성을 흉기로 위협한 행위 등으로 징계해고된 사람인데도 그 기자가 보기에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직원을 해고한 재협이 나쁘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확고히 가지고 글을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가 이런 자세를 가지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후속 보도에 나선 다른 기자 역시 앞서 보도한 기자와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재협이 처음 기자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하자 친한 기자가 지원사격에 나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협회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 그 언론들의 취재 과정에서 보인 태도는 어땠는지요?
“기자가 개인적 친분관계 때문에 취재보도에 착수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기본책무이며 위법성 조각사유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기자들은 도무지 저희의 해명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결론을 내려놓고 몰아가는 인상이 확연했어요. 예를 들어 “희망브리지가 재향군인회와 33억 원어치의 마스크를 불법으로 거래했다”는 보도를 한번 보지요. 그 보도가 나오고 나서 벌써 1년 8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에 향군 지도부도 바뀌었습니다. 지난해 4월 치러진 향군회장 선거에서 김진호 회장에 반대하던 세력이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전임 체제의 비리’를 확인한다며 광범위한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 보도가 맞았다면 향군에 막대한 마스크 판매 이익이 흘러들어 간 게 이미 확인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위사실이 확인됐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사실 국가보훈처가 향군의 모든 사업에 대한 승인 결정을 내리고 회계 내용을 세밀히 들여다보는 상황에서 ‘비밀사업’을 통해 이득을 챙겨 향군 회계 수입으로 잡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런 사정을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섣불리 향군과 희망브리지의 불법 거래 같은 기사를 쓰기는 어렵습니다.
- 그런데 그 매체는 4차례나 연속적으로 재협의 비리 의혹을 보도하지 않았나요.
“그 매체의 재협 비판 시리즈 마지막 보도의 첫 문장은 “재향군인회는 태양광업체와 불법 명의대여 계약을 맺고 재해구호협회에 마스크를 판매해 부당 이득을 챙기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돼 있습니다. “부당 이득을 챙기려 했다”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이 말은 “부당 이득을 챙기지 못했다” “부당 이득을 챙기려 시도는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 아닌가요. 그럼 “희망브리지가 무자격 재향군인회와 33억 마스크 거래를 했다” “재향군인회가 실정법을 위반했다”는 자신들의 앞선 보도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일반적인 언론의 문법으로 볼 때 매우 비상식적입니다. 이것이 ‘오로지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의 올바른 모습입니까. 저도 기자 출신으로 누구보다 언론의 고충을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보도에서 실수와 착오가 있다면 언제라도 바로잡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언론이 가장 소중히 간직해야 할 윤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김정희 사무총장 |
재해구호협회는 김정희 총장 아래서 지난 4년6개월여 동안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고 보니 그 과정은 순탄한 꽃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가시덤불을 헤치며 온몸에 가시가 찔리고 피를 흘리며 걸어온 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 총장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훌훌 떠나고 싶은 적도 많았다“고 한다. 보람과 희망, 고통과 좌절이 교차하는 길목의 고비에서 다시 그에게 힘을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선뜻 손을 내밀어 성금을 내는 일은 결코 쉬운
[MBN 이상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