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 세종호텔 총주방장 박효남(55) 셰프는 1961년 강원도 춘천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안도가 고향이었고 어머니는 서울 토박이다. 그런 그가 엉뚱하게 강원도가 고향이 된 이유는 아버지가 겪은 드라마틱한 삶 때문이다.
박효남 셰프의 작은아버지는 북한에서 면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치열한 이념 대립 속에 인민군이 작은아버지를 무슨 영문인지 체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위급함을 느낀 작은아버지는 급히 피신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인민군에게 붙잡히고 만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할아버지와 같이 끌려간 이들은 총살을 당했다. 천운이었는지 아버지 차례에서 총알이 떨어져 탄창을 갈아야 했고, 이미 죽은 목숨이라 생각한 아버지는 산 속으로 도망친다. 산에서 웅덩이를 발견한 아버지는 그곳에 몸을 피했고, 쫓아온 인민군은 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간다.
며칠간 산 속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버틴 아버지는 어둠을 틈타 마을로 내려온다. 인민군이 다시 들이닥칠 것을 걱정해 집 지하실에서 숨어 지냈다. 며칠 지나고 나서 건강이 안좋은 동생 앞으로 인민군 입영통지서가 날라 오자 동생 이름으로 인민군에 입대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입대한 그는 동료 몇몇과 탈영해 남쪽으로 발길을 향한다. 그러나 남한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아버지는 북파공작원(HID)으로 다시 군인이 되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강원도 지역 부대를 돌며 근무했고, 그러다 춘천에서 박 셰프가 태어났다.
박 셰프가 15세 되던 1975년. 아버지는 군에서 제대했고 그의 가족들은 외가가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한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야채 가게, 연탄 가게 등을 하며 4남매를 키웠다. 중학생 박효남은 쌍문동에서 종로까지 통학하던 중 요리와 연을 맺게된다.
어느날 하교길에 종로5가에 있던 수도요리학원 간판을 우연히 보게 된다. 매일 지나다니던 길이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눈에 밟혔다고 한다. 당시는 남자가 요리학원에 다니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가 학원 문을 두드리는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곳에서 그는 큰 인연을 얻게 된다. 영원한 스승이자 어머니처럼 모시는 하숙정(현 글로벌푸드아트수도전문학교 이사장)원장을 만나게 된 것. 하 원장은 요리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작고 시커먼 중학생을 남다른 애정으로 대한다. 그가 요리사 자격증을 딸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자격증을 따자 하얏트 호텔 입사를 주선해준다. 요리 인생 37년의 시작이다.
어린 그에게 호텔 주방 일은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처음 한 일은 선배 보조, 청소 등 다양했다. 하지만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억은 끝없이 이어지던 감자 깎기였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어린 시절 강원도에서 친구들과 서리해서 구워먹던 감자밭 주인이 복수한다고까지 생각했다.
그 시절 친구들과 감자를 먹었던 방법도 특별했다. 땅을 파서 감자를 넣고 그 위에 불을 올려 그 열기로 감자를 익혀 먹었는데 이 방법은 지금 그가 자랑하는 요리법과도 연관이 있다. 소고기를 깻잎으로 씌운 후 소금과 계란 흰자 거품으로 만든 거푸집을 덮어 오븐에 굽는 방법인데 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응용한 것이다.
주방은 그에게 ‘어머니’와 같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리는 것처럼 그 역시 손님들을 그런 마음가짐으로 맞는다. 그런 자세가 한 호텔에서 32년을 생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그가 요리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식재료다. 식재료는 요리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것. 이와 얽힌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도 생생하다. 그가 힐튼호텔에서 근무할 당시였다. 존경하는 선배이자 스승이기도 한, 작고한 오스트리아 출신 요셉 하우스버거 셰프와 있었던 일이다.
언젠가 외국 요리대회에 출전했을 때 재료로 사용하려고 준비한 성게알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하우스버거 셰프는 후배인 박 셰프에게 현지에서 싱싱한 성게알를 찾아오라고 시켰다. 말도 안통하고 길도 모르는 외국에서 박 셰프는 머리를 써서 일식집에서 재료를 구했다. 하우스버거 셰프는 어디서 구해왔냐고 물었고 사실대로 말한 그를 심하게 혼냈다. 셰프에게 가장 중요한 재료를 아무렇게나 구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최고의 재료를 최상의 상태에서 요리해야만 최고의 음식이 만들어진다는 교훈을 그때 배웠다.
30년 넘게 한 분야에 정진하며 대가(大家)의 자리에 오른 힘은 무엇일까?
그는 열 손가락이 아닌 아홉 손가락으로 요리를 한다. 어린 시절 친구 집에서 소 여물을 주기 위해 작두질을 하다 오른손 검지 두 마디를 잃었다. 중학교 졸업장과 요리자격증 하나가 전부였던 그가 대한민국 요리 명장이 된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사고와 연관 깊다. 청천벽력 같은 사고는 손가락을 앗아갔지만 반대로 그에게 긍정적인 자세를 선물했다.
30년이 넘은 지금도 그는 요리에 그 자세를 담는다. ‘요리는 인성’이라고 말하는 요리철학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훌륭한 인성은 그가 만든 음식의 화룡정점이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손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면, 그 역시 저절로 미소가 생긴다고 한다.
그는 요리업계에서 ‘전설’로 불린다. 외국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외국계 호텔의 총주방장 자리에 올라 15년간 그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저는 빈 접시를 확인하는 요리사입니다” 이 말은 식사를 다 마친 테이블에 있는 손님의 접시나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접시를 자신이 꼭 확인을 한다는 것. 손님이 남긴 음식에 나의 잘못된 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싼 가격을 주고 먹는 손님들에게 가격의 가치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손님을 또 하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요리계의 작은 거장’ 박효남. 그의 꿈은 운동선수였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체육중학교에 진학하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재능도 있었다. 하지만 16살에 요리학원에 다니며 실습으로 만든 자신의 음식을 먹는게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는 운동 국가대표가 아닌 국가가 임명하는 ‘대한민국 요리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요리의 심(뿌리)은 실력"이라고 단언한다. 스스로 꾸준한 노력으로 실력을 키워 그 실력으로 답을 하는 것이 진정한 요리사라는 것이다. 그는 37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음식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 시간만큼 더 요리와 함께 하고 싶은게 그의 바람이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후배
"부모님께서 지어준 이름 석 자의 깊은 뜻을 잊지 말고 인성이나 실력을 갖춘 셰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영원한 셰프가 되길.”
Next. ‘한국의 셰프들’ 여섯번째 이야기 손님은 대한민국 최고의 요리명가 한복려, 한복선, 한복진 세 자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기획·글=이길남 / 사진=이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