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에서 휴대폰으로, 다시 스마트폰으로. 삐삐는 10여년 전만해도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허리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90년대 대학풍경을 담은 영화 <건축학개론>에나 등장하는 ‘추억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톡톡톡, 두드리기만 하면 열리는 새로운 세상. 차갑고 딱딱한 기계에 기대는 세상. 메마른 세상에 허기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마음을 쏟을 무언가를 말이다. 대한민국을 마음의 수렁에 빠뜨린 ‘중독’을 주제로 기사를 연재한다.<편집자주>
지난 23일 50대 남성이 정신병원에 다시 가지 않겠다며 자신을 이송하러 온 사설 구급차 직원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알코올 의존증으로 1년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최근 퇴원한 이 남성은 가족들이 다시 병원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자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는 알코올중독자로 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다보니 감정의 자제나 행동의 통제가 사실상 힘든 상태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8명 중 1명이 알코올과 마약, 도박, 인터텟 등에 중독된 중독사회가 됐다.
특히 4대 중독인 알코올, 마약, 도박, 인터넷의 사회경제적비용은 109조 5천억원. 5조 9천여억원에 달하는 흡연이나 11조 300억원에 달하는 암의 사회경제적비용에 비해 독보적인 수치다.
특히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회 안전의 문제가 심각하다. 폭행 및 강도, 강간,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는 약 30% 이상이 음주상태에서 발생한다. 음주 관련 강간 및 강제추행 등 성범죄는 2005년 1만3336건에서 2011년 1만9498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알코올중독 전문 치료센터를 운영하는 W진병원 양재진 원장은 “알코올에 의해 뇌가 자극받다가 어느 순간 뇌가 망가지기 시작하면서 내성, 금단증상, 직업적·사회적 기능의 손상, 대인관계의 손상 등 4개지 변화가 나타난다”며 “이런 기능 손상으로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판단력과 통제력이 무너진다”고 설명했다.
알코올의 위험 속에 서울시가 최근 발표한 알코올 사용장애 선별자가검사 관련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다. 알코올 사용장애 선별자가검사도구 접속자 5356명의 검사 결과를 분석한 결과 남녀 모두 10명 중 8명 이상이 알코올 사용장애 추정군에 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무분별한 음주습관으로 사회생활에 장애를 초래하는 상태로, 성인남녀 80%가 잠정적 알코올중독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병의 진행 정도에 따라 알코올중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행동적 증상을 드러낸다.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고 거듭된 약속의 파기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이 늘어나고 위장된 태도를 취한다. 혼자 고립되어 있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도피적 태도가 증가하고 세상에 대해 비현실적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술에 대한 충동을 조절하지 못함으로 의지력은 고갈되고 만족감을 획득하기 위해 초조해 하는 행동과 태도가 증가된다. 만성적 단계로 진입해 가면서 반사회적 태도, 거부적이며 부정적인 태도가 만연되어 가며 폭력적 행동과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양 원장은 “알코올에 의해 뇌가 손상되면 여러가지 장·단기적인 정신 장애를 일으킬 수 있고, 한번 손상된 뇌세포는 회복되지 않아 더 위험하다”며 “특히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이 자신을 방어하려는 심리는 부정, 투사, 합리화, 분노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치료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재 알코올상담센터에 등록돼 관리를 받는 사람은 5521명으로 전체 추정환자의 0.36%에 그친다. 1%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알코올사용장애로 치료받은 환자는 10만명정도로 추정환자의 6%에 그쳤으며, 정신의료서비스를 이용한 비율도 8%정도다. 정신병적장애나 기분장애, 불안장애 치료환자가 최소 25%를 넘는 것과 비교해도 다른 정신질환보다 크게 떨어진다.
알코올 중독을 제한할 만한 정책도 사실상 전무하다. 예컨대 공공장소 음주규제 관련법조차 없고 주취자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과 수준은 지나치게 낮다. 만취자나 주취자, 미성년자 조차도 어렵지 않게 술
이해국 가톨릭의대 정신과 교수는 “알코올에 대한 접근성을 제한하는 정책도, 예방서비스나 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과 공급도 모두 부족하다”며 “중독이 사회안전과 국가경쟁력, 국민보건상 주요 위험요인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인지하고, 국가적으로 이에 대한 적극적 보호환경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예림 매경헬스 [yerim@mkhealt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