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동차 행사장을 다녀보면 여지없이 탑기어 코리아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남성들 사이에선 어지간한 TV드라마보다 훨씬 인기가 높은 듯하다. 차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는데도 불구하고 그간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어 갈증을 빚어오던 것이 조금은 해소된 것이 아닐까.
◆ 탑기어, 그게 뭔데 그래?
국내선 탑기어 (Top Gear) 가 최근에야 핫이슈가 됐지만, 사실 이 프로그램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2000년대 초 “한국 자동차는 냉장고와 세탁기에 바퀴를 단것과 같다”고 표현해 현대차를 격노하게 만든게 바로 이 프로그램이다.
제레미 클락슨, 리차드 햄먼드, 제임스 메이(나중에 합류) 등 3명의 MC들이 스튜디오에 동시에 등장하고, 다양한 도전을 통해 재미를 추구하는 예능프로그램으로 바뀌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이들 MC 3명은 모두 차에 열광하는 개구장이 같은 캐릭터를 갖고 있다. 특히 메인MC인 제레미 클락슨은 대부분 자동차에 거침없는 독설을 내뿜는 못된 인물로 그려졌다. 그러다보니 시청자들의 욕구를 대리 만족 시켜주고 불만을 해소 시켜 준다는 점에서 인기가 높다. 3명의 MC가 각자 맡은 캐릭터와 취향이 극명하게 다르고, 이를 통해 서로 유치하게 티격태격하는데 웃음의 포인트가 있다.
예를들면 MC 중 막내인 리차드 햄먼드는 키가 작고 귀여운 얼굴인데다 이름이 ‘햄먼드’라는 이유 때문에 ‘햄스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말하자면 이들은 중고등학생 수준의 지적능력을 갖고 있는 등장인물들이지만 자동차에 있어서는 해박한 지식으로 핵심을 꿰뚫는다는 점 때문에 호락호락 볼 수 없다.
탑기어는 말하자면 요즘 유행하는 ‘리얼 예능’ 프로그램의 선두주자다. 어딘가 모자란듯 보이는 사람들이 나와 모든 것을 시도한다는 점을 보면 우리나라의 무한도전을 비롯한 세계 여러 예능 프로그램의 효시가 된 셈이다.
슈퍼카, 양산차는 물론 골동품차, 트랙터, 트레일러 등 자동차와 심지어 선박이나 항공기 등 탈것을 모두 동원해 상상을 뛰어넘는 도전을 하면서 여러차례 이슈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코미디 예능프로그램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2002년부터는 매주 일요일 저녁 8시에 한시간씩 방영되며 영국 시청률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프로그램이 됐다.
◆ 색다른 느낌의 탑기어 코리아
“우와 참신하다”
탑기어 코리아를 처음 본 친구가 흥분해서 얘기했다. 람보르기니로 택시를 태워주는 장면을 보더니 프로그램에 홀딱 반한듯 했다. 그런 설정이 뭐 대수냐고 퉁명스레 물었더니,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슈퍼카 실내를 한국 TV에서 보여주는것 자체가 놀랍고 재미있다고 했다. 실제 슈퍼카를 소유하고 있는 장근석 등 유명 연예인도 슈퍼카에 올라타는 모습이 TV에 방영되는 것은 그동안 금기시 돼 있었다고 하니 의외다.
한국에서 탑기어를 직접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골수 자동차 마니아들의 우려도 많았지만 정작 방송을 보면 대부분 만족하는 듯하다. 서킷을 빌려서 운행할 뿐 아니라 차를 여러대 부수고, 최근에는 심지어 쇼핑몰을 빌려서 미니와 포르쉐를 경쟁시키기도 하는 모습은 국내 다른 어떤 프로그램에서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이렇게 차에 관심이 많았다는걸 그동안 몰랐을까. 공중파 3사들은 뒤늦게 머리를 치고 있는 듯 하고, 다른 케이블 방송사에서는 영국판 탑기어가 아닌 미국판 탑기어를 가져와 방영하기도 한다.
◆ 탑기어 프로그램, 어떻게 구성됐나
영국 탑기어와 탑기어 코리아는 모두 크게 7가지 코너로 이뤄져 있다. 매주 3~4가지 적당한 코너를 선택해 방송한다. 여러가지 코너를 방송하다보니 촬영팀이 2팀으로 나뉘어져 각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 탑기어 시승기(Top Gear Race)
탑기어의 대표적인 코너다. MC들이 한명씩 등장해 새로 출시된 차나 흔히 접하기 힘든 슈퍼카나 반대로 형편없는 차를 타고 리뷰를 진행한다. 차량에 대한 독설이나 비아냥 등을 통해 웃음을 끌어낸다. 이를 통해 영국식 유머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뛰어난 영상미와 자동차의 핵심을 끄집어내는 능력이 돋보인다. 여기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따라 영국은 물론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의 인기가 좌우되기 때문에 자동차 회사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코너다.
- 스타랩타임(Star in a Reasonably-Priced Car)
유명인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고, 탑기어 전용트랙을 1바퀴 주행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는 코너다. '쓸만한 저가 자동차(Reasonably-Priced Car)’로 선정된 차를 유명인이 직접 운전하는게 재미있다. 차를 직접 운전하지도 않을 것 같은 유명인들이 차를 운전하면서 보여주는 여러가지 반응을 방송한다. 탑기어 코리아에서는 가수 조권이나 연기자 김수로씨가 등장해 재치있는 입담과 운전실력을 보여주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는 김옥빈이 등장해 자신이 2억 넘는 슈퍼카 CLS 55 AMG를 몰고 있다는 점을 밝히더니 전문 레이서 못지 않은 실력까지 과시했다.
탑기어의 공식드라이버이자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인물인 ‘스티그’가 탑기어트랙에서 시운전을 하는 코너다. 탑기어에서 꾸준히 측정된 기록은 점차 쌓여 각 차량의 성능에 대한 객관적인 척도가 된다. 실제로 자동차 메이커들이 홍보를 할 때도 독일 뉘르부르크링 기록과 함께 탑기어 파워랩타임이 인용 되는 경우가 있다.
- 탑기어 챌린지 (Top Gear Challenge)
자동차 뿐 아니라, 배나 비행기 등 다양한 탈것들을 이용해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하는 코너다. 상상을 깨는 도전을 하는 인기코너다. 전투기와 자동차의 속도대결등 가벼운 실험부터 자동차를 개조해 우주왕복선 만들기, 농업용 트랙터를 이용한 경주, 수륙양용차로 도버해협 횡단하기, 차를 용접해 리무진 만들기 등 기상천외한 도전과 실험을 수없이 해왔다. 탑기어 코리아에서도 기름 6리터로 150km 떨어진 곳까지 달리기. 서울에서 부산까지 슈퍼카와 기차, 비행기의 대결 등 영국에서 했던 에피소드와 비슷한 프로그램을 방영해 인기를 끌었다.
- 쿨월 (The Cool Wall)
탑기어 스튜디오에서 방청객들과 함께하는 코너로 특정 차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와 MC들의 평가를 바탕으로 방청객들과 즉석에서 협의하여 등급을 나누는 코너다. 영국에선 일반적으로 시승기를 통해 결론을 낼 수 없는 경우 이 코너가 등장해 차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탑기어코리아에서는 몇차례 진행했지만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 탑기어 스페셜 (Top Gear Special)
탑기어 코리아에서는 아직 탑기어 스페셜이라 할만한 것이 없었다. 영국 톱기어에서는 특정한 나라나 지역를 찾아가 그곳에서 자동차나 탈것를 이용한 도전을 펼치는 것을 탑기어 스페셜이라 부른다. 현재까지 북극편, 볼리비아편, 베트남편, 미국여행편등을 방송했다.
◆ 쓰디쓴 신고식, 이제는 커갈때
처음 탑기어코리아가 국내 방영 됐을 때 담당 PD들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했다. 번호판을 위조해서 붙이고 서킷을 주행하거나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를 달린 것이다. 개인에게 슈퍼카를 빌렸는데 차주에게 과속딱지가 날아간다거나, 혹은 트랙을 험하게 달린 것이 방송돼 중고차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위조 번호판을 쓰는 것은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XTM PD와 제작사 PD등 관련자들이 불구속입건되고 방송전에 사과 문구를 내보내는 등 징계를 받았다.
영국 탑기어를 한국 실정에 맞도록 수정하면서 아쉬운 부분도 드러나 보인다. 최근 탑기어 코리아는 영국 탑기어 중 눈길을 끄는 에피소드를 따와서 방송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도 눈에 띄고, 일부 MC의 농담이나 태도가 영국판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으로 보여 한국인들 눈에는 ‘손발이 오글거린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MC 구성은 가장 큰 아쉬움으로 지적된다. 영국의 탑기어는 유머러스한 인물들 3명이 똘똘 뭉쳐 티격태격 싸우는 느낌으로 이뤄졌지만, 탑기어 코리아는 나이많은 김갑수와 연정훈, 김진표로 이뤄져 연결고리를 만들기 어렵다. 김진표는 숨겨진 끼와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김갑수가 차에 대해 그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고, 슈퍼카를 여러대 소유했다던 연정훈이 운전을 잘 하지 못한다는 점은 시청자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국내 제조사들과 수입차 업체들이 그리 호의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사실 국내 국산차 업체들과 수입차업체들은 그동안 방어적 홍보의 입장을 취해오고 있다. 차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리기 보다는 차라리 나쁜점을 지적 당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며 다른 차와 비교하기를 극도로 꺼리는 편이다. 그런데 탑기어코리아는 제조사들이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탑기어코리아와 갈등이 생기는가 싶었던 제조사 관계자들도 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난주 방영된 ‘미니’ 편에서는 오히려 미니의 여러 라인업을 비룻해 최신 차종인 미니 쿠페까지 제공했다. 방송에서 김진표는 “여전히 너무 비싸다”면서 악동의 모습을 보였지만, 이어지는 영상에서 포르쉐보다 재미있게 달리는 미니쿠페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군침을 흘렸다.
탑기어코리아는 판매사와 소비자들이 모두 만족하는 정보 프로그램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그 정답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 시즌에선 더 많은 발전을 통해 영국에서처럼 국내서도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한용 기자 / whynot@top-rid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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