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승대와 황산마을이 주는 위로
거창에 왔다. 겨울에 더욱 운치 있는 한옥마을과 수승대라는 절경이 있고 거창 신 씨들이 모여 사는 고장. 한옥에서 며칠을 묵었고 마을 흙담길을 따라 산책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살다 보면 도망쳐야 할 때가 있다. 삶이란 그라운드에는 언제나 내 편은 적고 적들은 사방에 북적이는 법이니까. 도망은 때로 도움이 된다. 삼십육계줄행랑. 일찍이 손자도 그걸 알고 있었다.
↑ 거창 황산마을의 한옥은 민박집으로도 운영된다. |
도망도 칠 겸, 계획도 세울 겸 해서 온 곳이 거창이다. 왜 거창이죠? 하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여행작가를 이십 년 넘게 하며 여행으로 가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비슷비슷하고, 모든 곳에는 뭔가가 있다는 알게 됐다. 거창 황산마을은 한옥 5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인데, 아직도 장작불을 들이는 방을 가진 집이 있고 마당 한 귀퉁이에 장독대를 만들어 놓은 집도 있다.
덕유산 자락에 들어 앉아 있는 이 마을은 거창 신 씨 집성촌으로 조선 연산군 때 1501년 신(愼) 씨 일가가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여러 채의 대문에 신 씨 문패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수호신을 보는 것 같아 믿음직하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 나쁜 기운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마침 동네 어르신이 지나가시길래 수령을 여쭈니 600년은 넘었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와, 600년이라니.
↑ 한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가 있다. |
큰땀은 마을 입구에 들어서기만 해도 양반마을임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마을 전체가 고래등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와집들이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황산마을의 한옥들은 대부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들이라고 한다. 학문으로 집안이 일어서면서 신축하거나 개축한 한옥이라 그런지 조금은 독특하다. 안채에 방을 많이 들이고, 대청을 좁혔으며 화장실도 집안에 만들었다. 오늘날로 보면 정통 한옥이 아니라 ‘하이브리드’ 한옥인 것이다.
↑ 황산마을 들어가는 입구 |
아마도 이는 이 마을이 ‘친족 공동체’인 것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옆집에 삼촌이 살고, 그 뒷집에 조카가 사니 일부러 차단용 울타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까치발을 하면 담장 너머로 집과 마당이 훤히 보인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고택이 궁금하면 들어가 조용히 구경해봐도 좋다. 야박한 도시와 달리 낮에는 대문을 잠그지 않은 집들이 대부분이다. 문풍지를 발라 놓은 곁문들과 툇마루, 햇볕이 잘 드는 마당, 항아리 등 우리네 전통가옥에서 느낄 수 있는 비움과 열림의 미학, 넉넉한 인심의 향기가 배어 나온다.
↑ 황산2구마을은 벽화와 재미난 조형물을 즐기며 걷는 재미가 있다. |
↑ (좌)계곡과 바위가 어울려 빚어내는 수승대의 절경 (우)시인묵객이 거북바위에 새겨놓은 시구 |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룩을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이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이다. 바위 한쪽에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가 있는데 이곳에 한 말의 막걸리를 넣었다가 스승에게서 합격을 받으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먹었다는 장주갑(藏酒岬)이다. 구연교 다리를 지나면 요수 신권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친 곳인 요수정(樂水停)이라는 정자가 눈앞에 들어온다.
↑ (위) 요수 신권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친 요수정 (아래) 수승대 가는 길 얼어붙은 개울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 |
수승대를 돌아보고 돌아와 마루에 앉아 책을 읽는다. 일본 작가의 에세이인데 “마흔이 되도 즐거운 일은 있구나. 기대되는 일도 있다”라는 문장을 읽고서는 ‘음, 내가 마흔 때 저렇게 시니컬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십 둘인 나는 지금 마흔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절대 안 갈래욧!” 하며 전봇대라고 꼭 붙잡고 버티겠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일도 기대되는 일도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나쁘고 황망한 일 가운데 조금이나마 즐겁고 보람된 일이 있어 여기까지 버티며 온 것이다. 삶은 복잡하고 총체적인 것이다. 하나의 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 예쁜 벽화가 그려진 황산2구 마을 |
영원히 살지 못하는 작디 작은 인생에서 나는 파주에서 먼 거창이라는 고장까지 와 어느 마을의 한옥 마루에서 겨울 햇살이 영롱하다 찬탄하며 책을 읽고 있다. 조금 있다가 마을에 있는 식당으로 가 추어탕을 먹으려고 한다. 경상도 사람인 나는 남원식 추어탕보다는 배추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고 끓인 경상도식 추어탕이 더 좋다.
제피가루를 넉넉하게 뿌려 먹으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면서 겨울이 고맙게 느껴진다. 그리고 밤에는 따뜻한 아랫목에 등을 붙이고 깊은 잠에 빠지겠지. 마을 입구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밤을 지키고 있으니 아마도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새해 계획은 아직이지만, ‘좋은 인생’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잠을 푹 자는 것이란 걸 늘 염두에 둔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2호(25.1.0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