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유가사에서 일하고 쉬기
겨울의 사찰, 비운 만큼 채우는 방법을 알려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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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사 전경 |
템플스테이처럼 새벽 예불에 참여해야 하냐는 질문에 유가사 주지스님은 “푹 자라. 그냥 쉬다 가면 된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템플 스테이’와 ‘워케이션(work+Vacation)’을 합친 ‘템플 워케이션’은 단순 재택 및 원격 근무를 넘어 사찰에서 쉬듯 일하며 여가를 보내는 것이다.
머리 위에 흰 눈을 이고 있던 비슬산 천왕봉은 발우공양을 마치고 나오자 말갛게 이마를 드러냈다. ‘쌀 포(苞)’자를 써 ‘포산’으로도 불리는 비슬산 자락의 유가사가 추위에 언 K 직장인의 몸을 부처님처럼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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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유가사 템플 워케이션 업무공간. 책상에 앉으면 비슬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
템플 워케이션(Temple+work+Vacation)과의 첫 조우
트렁크를 끌며 일주문을 지나고 무시무시한 사천왕문을 지났다. 짜증이 나는 통화를 하며 구불구불 오르막길을 운전해온 터라 열이 채 가시지 않았다. 열 군데 방향으로 좋은 기운을 찾아나간다는 ‘시(十)방루’를 지나고, 사찰 경내를 수호하는 국사당의 ‘만(卍)’자를 보며 범종루까지 지나자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씩 진정된다. 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옥포읍, 가창면과 경북 청도군 각북면에 걸쳐 위치해 있는 비슬산(1084m). 팔공산에 비해 2인자로 치부되지만, 팔공산이 대구의 북쪽을 달려나가는 큰 산이라면 비슬산은 대구를 남쪽에서 넉넉하고 든든히 받쳐주는 산이다.
대구는 눈이 잘 오지 않지만 비슬산 정상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37년간 수도한 비슬산은 ‘동국여지승람’에는 ‘수목에 덮여 있는 산’이라는 뜻의 ‘포산(苞山)’으로 적혀 있기도 하다. 비슬산의 바위 모습이 구슬과 부처 형상을 닮았다 하여 유가(‘아름다운옥 ‘유(瑜)’+절 ‘가(伽)’)사로 불리는 사찰은 한때 99개의 암자에 3000명의 승려가 머물렀을 만큼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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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여래좌상이 있던 자리(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용화전에 모셔 놓았다)에서 천왕봉을 향해 올려다보니 처마에 걸린 종 모양 풍경이 눈 쌓인 천왕봉과 3층 석탑 사이에 걸려 있다. |
숙소는 비슬산 유가사의 좌측에 위치해 있었다. 보일러와 장작을 동시에 쓴다는 방은 뜨끈뜨끈했다. 황토로 마감한 벽에서 깊은 흙 향기가 훅 풍겨 온다. 도시의 답답한 아파트와는 다른, 높은 층고의 서까래 천장이 객을 반겼다. 짐을 풀어두고, 스님과의 차담을 위해 다시 밖을 나온다.
“천왕봉까지 비슬산 백만 평이 다 내 땅이고, 비슬산의 맑은 물을 매일 마시니 내가 제일 부자지.” 우롱차를 내려주던 주지 스님은 잔이 빌 때마다 따뜻한 차를 계속해서 따라주셨다. 스님의 방에는 1993년 도난 당했다가 30년 만인 지난해 되찾은 영산회괘불도 사진이 있었다. 장물아비가 인터넷에 장물 정보를 올리는 김에 덜미가 잡혔다. 석가모니가 인도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강렬한 필력과 과감한 색채로 그려 놓은 그림이다. 진품은 사찰 어딘가 깊숙이 보관되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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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지스님과의 차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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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과의 차담 프로그램 |
비슬산은 비파 비(琵), 큰 거문고 슬(瑟)자에서 보듯, 정상 바위의 생김새가 신선이 앉아 비파를 켜는 형상이라는 설도 있고, 신라시대 인도스님들이 와서 산을 보고 ‘덮는다’는 뜻의 인도의 범어(梵語) 발음을 그대로 따라 ‘비슬(琵瑟)’이라 이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황토 법당에서 노트북을 하다가 숲길 산책하기
스님과의 차담을 마친 뒤 노트북을 들고 템플 워케이션의 업무공간인 ‘설법전’으로 향해본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모니터, 프린터가 올려져 있으며, 간단한 음료와 스낵이 마련된 탕비 코너까지 마련돼 있다. 일하다 당이 떨어졌다면 공양 시간 전 간단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주방으로 갈 것. 화장실도 실내에 있다.
안구 건조를 부르는 사무실을 벗어나 황토 흙으로 마무리된 너른 업무공간에서 노트북 너머로 비슬산의 넉넉한 자락을 바라본다. 풀리지 않던 글의 실마리가 떠오를 것도 같다. 9살에 출가해 20살에 승과시험에서 장원을 하고 비슬산에 들어와 37년간 수행했다는 일연 스님의 정기를 이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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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템플 워케이션을 운영하고 있는 유가사(사진은 대웅전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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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무공간인 ‘설법전’ |
평일 스케줄에 맞춰 업무 전화를 하고, 답 메일을 보낸 뒤 잠시 설법전을 나와 경내를 걷는다. 바위 조각에 적힌 시를 읽으며 걷다가 주민들이 가뭄이나 질병, 적군의 침입에 시달릴 때마다 소원을 빌었다는 석조여래좌상도 들여다본다. 어느덧 점심 공양 시간이다. 남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식판을 가득 채우던 도시에서의 구내 식당과는 달리, 음식을 새 모이처럼 담게 된다. 유튜브를 틀어두고 허겁지겁 먹던 밥. 휴대폰은 어차피 통하지 않고, 접시 위에는 내 위장 속으로 집어 넣어야 할 음식들이 있다.
재료의 물성을 생각하며 밥을 먹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고소한 머위나물과 고기를 넣지 않은 육개장에 상큼한 노각 무침. 식사를 마친 뒤 외부 개수대로 발우공양을 하러 나가려 하자, 음식 담당 보살님이 만류한다. “아유, 추워요. 그냥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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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 보살님께서 밥을 먹고 있는 내 앞에 생화 화분을 놓고 간다. |
이젠 구름 물고기 조명 만들기 체험에 참여할 차례. 물 붓으로 적신 한지를 뜯어 물고기의 눈과 지느러미를 붙여준다. 종이를 뜯는 눈이 아이들보다 더 반짝거린다. 조명을 켜니 물고기 몸에서 빛이 난다. 동봉된 편지에 글을 적어 누군가에게 선물해볼까.
다시 노트북을 펼쳐둔 설법전으로 향해 본다. 기사 하나를 송고하고, 간담회와 미팅 일정을 스케줄러에 체크한다. 오후 6시, 설법전의 불이 꺼진다. 유가사의 업무시간도 도시의 시간과 함께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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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속부터 하늘까지 부처님 말씀을 전한다는 구름 물고기. 워케이션 프로그램 가운데 조명 만들기 체험이 진행된다. |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일상으로의 회복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샤워기로 목욕을 할 수 있는 현대식 욕실 역시 이곳 프로그램의 장점. 퇴근 후 저녁 공양까지 마무리하고 삼성각 소나무 위로 드리워진 별들을 보다 일찌감치 자리에 눕는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창호지 문과, 뜨끈한 선방의 온돌 바닥은 일과시간을 알리는 새벽 범종 소리도 듣지 못하고, 8시간을 내리 자게 만들었다.
아침에 종무소 직원이 문을 두드려서야 깼다. “안 추우셨어요?” 계속 자라고 하면 더 잘 수 있을 것 같았지만 30분이면 끝나는 조식 타임을 놓칠세라 빠르게 공양간으로 달려나간다. 배가 부르다. “절밥을 먹는데 계속 살이 찐다”던 템플 워케이션 홍보 담당자의 말이 떠오른다. 소화를 시키기 위해 16기의 부도탑이 있다는 절 왼쪽 둘레길로 산책을 나갔다. 도성암 아래쪽 언덕에 16기의 부도탑들이 서 있다. 대부분이 종형의 탑신을 올린 모양으로, 많은 부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아, 당시 유가사의 높은 격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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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마주한 숙소 풍경 |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주지스님을 만났다. “밤새 따시게 잤나? 집밖에 나오면 고생이데이. 밥을 아까 너무 쪼끔 묵든데.. 더 먹고 마이 커라. 모자가 있어야 할 낀데, 안 춥나?” 마흔이 넘었는데 더 클 키가 있을까. 외할아버지처럼 내방객의 보온을 걱정해주는 주지스님을 뒤로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잠에 빠져든다. 도시에서는 바짝 긴장한 채 바쁘게 쫓기던 몸이 선방에서는 스르륵 긴장의 끈을 쉽사리 놓는다.
비슬산 자락의 유서 깊은 천년 고찰 유가사에서 경험하는 템플 워케이션. 답답한 도시를 벗어나 일과 휴식이 함께하는 색다른 시간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원적외선이 가득한 황토로 지어진 설법전에서 업무를 보고 유가사 갤러리에서 차를 마시며 그림을 그리다가 저녁엔 바로 옆에 위치한 숙박시설에서 머무르며 잠시나마 수행자의 일상을 경험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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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사 템플 워케이션 숙소 전경 |
‘선방의 문고리만 잡아도 지옥고(地獄苦)는 면한다’고 했던가. 유가사 문고리를 잡고 머문 이틀간의 시간은 적어도 당분간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공격들을 막아내 주리라. 비슬산 정상 가까이 붉은 참꽃이 피는 봄에 다시 이 곳을 찾아와야겠다. 그땐 BTS가 방문했다는 비슬산 대견사도 들러봐야지.
[유가사 템플 워케이션]
장소: 유가사 일원(대구 달성군 유가읍 유가사길 161번지)
일시: ~2024년 12월 31일까지 매주 수~금요일
참가료: 2박3일 8만 원(1인 기준)
준비물: 수건 및 세안용품
지원내용: 식사 6식(2박3일), 공유오피스와 체험비 무료, 숙박료 50% 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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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바로 프린트해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 |
아이까지 돌보는 가족형 워케이션
최연소 군수가 꿈꾸는 ‘젊은 도시’ 대구 달성군
지난 4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한 ‘워케이션 활성화 사업 공모’에서 최종 선정된 대구시 달성군은 전국 최연소 단체장인 최재훈 군수(1981년생)가 이끌고 있다. ‘젊은 문화 도시’를 꿈꾸는 달성군은 실제로 인구 수 25만 7,924명(2024년 10월 기준)으로 웬만한 시보다 인구가 많으며, 평균 연령도 42세로 ‘군’이라는 행정구역이 무색할 만큼 젊다.
지난해 출생아 수는 1,712명으로 전국 군 단위 지자체 중 가장 많았으나, 2022년 11월 이후 인구 수가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 달성군이 ‘가족형 워케이션’ 사업에 적극 나선 이유. 현재 달성군의 가족형 워케이션 대상지는 유가사를 포함해, 비슬산군립공원 ‘호텔 아젤리아’ 공유 오피스와 함께, 동물과의 생태 힐링이 가능한 ‘가창 네이처파크’ 등 총 3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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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창 네이처파크 워케이션 |
유가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호텔 아젤리아는 비슬산 군립공원의 숙박 인프라와 연계해 힐링 숲 테마로, 호텔에서 도보로 접근할 수 있는 메인 공유오피스에서 창문 너머로 대견사 아래 풍광을 즐기며 일할 수 있다. 가창 네이처 파크는 ‘호텔 드 포레’에 마련된 자연과 동물 테마의 워케이션으로, 소나무 정원에 마련된 친환경 공유오피스에서 일하다 피톤치드가 가득한 편백나무 숲속 산책길을 걸으며 쉴 수 있다.
부모는 업무공간에서 일을 하고, 그 동안 아이는 숲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하는 체험학습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워케이션 프로그램의 장점. 이미 제주, 부산, 양양 등지에서 워케이션이 운영되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은 부족했던 것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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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 아젤리아 근처에 위치한 공유 오피스 |
달성군은 2박 3일 가족형 워케이션 프로그램을 오는 12월 말까지 선보이며, 내년 3월부터 2차 운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용객에겐 공유오피스 무료 이용을 비롯해 숙박비 50% 할인, 무료 체험 프로그램, 로컬상품권(대구로 3만 원권) 또는 이월드 야간이용권 2매 증정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
[글 박찬은 기자 사진 박찬은, 대구광역시관광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