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넘어 실천적 라이프스타일로
늘어나는 여성 축구 동호인들
직관, 블록코어 룩으로 확장되는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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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
블랙핑크의 멤버 제니가 2022년 ‘Pink Venom’ 뮤직비디오에서 입고 나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저지는 공개 직후 품절 사태를 일으켰다. 4세대 아이돌 뉴진스 또한 무대 의상으로 블록코어 룩을 많이 선보였다. 남성을 가르치는 슬랭인 ‘블록(Bloke)’과 꾸민 듯 안 꾸민듯한 스타일의 소박하고 평범한 멋을 추구하는 ‘놈코어(normcore)’의 합성어인 ‘블록 코어(Bloke Core)’룩은 축구 유니폼에서 영감을 얻은 스포티한 트렌드로, 계속 유행 중이다. 최근 발렌시아가는 ‘사커 시리즈(Soccer Series)’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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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때리는 그녀들> 등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도 인기를 모으고 있고, 여성 축구 및 풋살도 대중화 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KFA)에 따르면 2017년 말, 97개 팀, 2,312명이었던 여성 축구 동호인이 2022년 말, 173개 팀, 5,010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역사적으로 남성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축구의 판도가 확 달라지고 있다. 그만큼 볼 차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이제 축구는 모두의 스포츠이며, 팬덤 형태의 단순한 경기 응원 및 관람을 넘어 직접 참여하고 즐기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성들, 축구에 눈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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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픽사베이] |
역사적으로 축구에 대한 관심은 남성 중심적이었다. 역사적으로 통계적으로 봐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여성의 축구에 대한 관심도가 엄청나게 높아졌다. 지난 아시안컵의 경우 심야시간임에도 불구, 주변의 많은 여성 지인들이 실시간으로 SNS 피드에 경기 결과에 대한 코멘트를 엄청나게 업로드했다. 양적으로 여성 팬들의 관심도가 급증했음을 실감하는 찰나였다.
2002 월드컵 이후의 박지성 전성시대쯤으로 돌아가보자. 마치 박찬호가 LA다저스의 선발로 나올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그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몸담는 순간 한국의 많은 축구 팬들은 영국 프리미어 리그 경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8시간 정도의 시차를 극복하면서까지, 그러니까 새벽까지 눈 벌겋게 뜨고 꼭 박지성이 출전하지 않더라도 프리미어 리그 각 팀의 경기를 시청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현지 구장에서 이들의 경기를 직관하는 것이 버킷리스트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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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여성 팬들의 관심이 남성 팬들의 관심도를 이겨내지는 못해 보였다. 아마도 ‘2022 피파 월드컵 카타르’가 어떤 분수령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별 예선 리그에서 교체 선수로 투입된 한 선수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라운드로 뛰어나왔다. 바로 조규성이었다. 심지어 훤칠한 키를 이용한 헤딩 슛에 강점을 가진 선수였다.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그의 SNS 팔로워는 순식간에 급증하기 시작했다. 불과 몇만 명에 불과하던 팔로워 수가 하루 만에 수십 만 명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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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H조 2차전에서 조규성이 두 번째 헤더 골을 성공시킨 뒤 환호하고 있다. <카타르/박형기 기자>[이미지=매경DB] |
스트라이커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덜 인기가 있는 수비 포지션의 김민재 선수도 눈에 확 띄었다. 남녀 불문하고 그의 투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기도 했었다. 이 분수령을 전후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해외 명문 구단 러시가 다시금 시작됐다. 조규성은 K 리그에서 덴마크 리그인 미트윌란으로 이적했다.
김민재는 이탈리아 리그 소속인 SSC 나폴리로 이적했다. 심지어 수십 년 만에 나폴리를 세리에A 우승팀으로 만들고선 독일 분데스리가 명문 구단인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다. 프리미어 리그 토튼햄의 캡틴 손흥 민은 여전히 매 시즌 레전드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팬덤화되는 여성 축구팬의 등장과 확산
‘조규성은 잘 생겼다. 황희찬은 멋지다. 이강인은 귀엽다. 김민재는 푸근하다. 손흥민은 귀엽고 멋지다. 심지어 설영우도 잘생겼다. 실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마치 아이돌 그룹의 팬덤에서 사용하는 용어들 같지 않은가? 맞다. 이제 축구에도 이런 팬덤이 존재한다. 남성들에 의해서만은 결코 이 같은 팬덤이 확장되지 않는다. 이들을 통해 축구를 보고, 축구를 하는 재미에도 푹 빠져버린 여성들이 밀물처럼 많아지면서 이러한 팀별, 선수별 팬덤 문화가 점차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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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은 소비로까지 이어졌다. 루이비통은 2002 월드컵이 종료되자 마자 조규성과 계약을 했다. 누가 뭐래도 원 톱인 손흥민은 버버리의 글로벌 앰배서더로 활동 중이다. 손흥민과 조규성은 패션 매거진의 커버 모델이 되기도 했다. 황희찬은 구찌 등의 명품 하우스 브랜드와 화보를 찍었다. 심지어 그는 패션에 관심이 굉장히 많다. 김민재도 돌체앤가바나, 브루넬로 쿠치넬리 등과 패션 화보를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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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르월드컵이 열린 지난 2022년 손흥민, 황희찬, 황의조, 김민재, 김승규 등 대표팀 선수 사진으로 래핑된 A350 아시아나항공기 동체. [박형기기자](매경DB) |
브랜드들이 이들과 함께 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들의 팬덤을 소비로 연결 지으려는 전략적 행위인 것이다. 전문가들은 축구가 여성들의 새로운 관심사로 급부상한 시점이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라고 말한다.
2022년 8월경부터 여성의 ‘축구’ 키워드 검색량이 전년 대비 174% 이상 증가했다는 것. 남성들의 검색 증가량이 82%인 것에 비하면 압도적 수치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즈음에서 더 눈에 띄는 건 팬덤 형태의 단순한 경기 응원 및 관람을 넘어 직접 참여하고 즐기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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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때녀’(골 때리는 그녀들) 등 다양한 분야의 여성들이 축구를 위해 열정을 바치는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 역시 이에 대한 욕망에 불을 지폈다. 검색 사이트에서 ‘여자 풋살’ ‘여성 축구’ 등을 검색해보면 이에 대한 움직임이 실천으로 이어져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단박에 확인할 수 있다.
축구의 조금 작은 버전, 그러니까 라이프스타일 축구라고 칭할 수도 있는 풋살의 여성 커뮤니티, 동호회 등이 굉장히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도심에 위치한 풋살장에서도 축구를 즐기는 여성들을 보는 건 이제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조기 축구와 같은) 생활 축구에 이어 여성 풋살 역시 완전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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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KFA)에 등록된 여성 축구 동호인의 양적 증가를 보면 더 확실하게 여성 축구 트렌드가 도래했음을 직감하게 된다. KFA 자료에 따르면 2017년 말, 97개 팀, 2,312명이었던 여성 축구 동호인이 2022년 말, 173개 팀, 5,010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고 전해진다.
패션으로 자리잡은 ‘블록 코어 룩’
여성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하면서, 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패션 아이템 역시 핫한 트렌드가 됐다. 이 역시 아시안컵이 열린 2022년과 맞물리는데, 블랙핑크의 멤버 제니는 2022년 9월 발매된 곡 ‘Pink Venom’ 뮤직비디오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저지를 리폼해 입고 등장했다. 뮤비 공개와 동시에 아디다스의 맨유 저지는 순식간에 품절되는 기현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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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세대의 지지를 받고 있는 걸그룹 뉴진스 역시 데뷔곡 ‘Attention’ 뮤직비디오에서 축구 유니폼을 입었었다. 전 세계적으로 축구 유니폼은 핫하고 힙한 패션 트렌드가 됐고, 축구 유니폼을 활용한 ‘블록 코어 룩’이 패션계를 사로잡았다. 블록 코어 룩은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스타일링이지만, 여성들 역시 맨유, 맨시티 등의 유명 축구팀 저지를 곧잘 패션 아이템으로 활용한다.
명품 하우스 브랜드들이 출시한 블록 코어 룩 아이템에서도 이 같은 트렌드는 인지된다. 최근 발렌시아가는 완전한 블록 코어 룩 아이템을 선보였다. 이름에서부터 ‘사커 시리즈(Soccer Serie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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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분수령으로 삼아 여성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졌다는 것만큼은 불변의 사실이다. 동시에 단순히 그 관심이 모니터나 경기장 안에서만 끓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매거진 편집팀에서도 축구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남녀 에디터 모두 대부분 정확한 축구 용어를 사용하며 대화를 이어나간다는 것 역시 이 확장의 결과다.
진입 장벽이 낮고, 즐거움은 배가 되는 스포츠
축구는 왜 여성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 걸까? 사실 여성들에게는 요가, 필라테스, 헬스 등의 체형 보정 및 다이어트 중심의 운동이 인기가 많았다. 이외의 스포츠로는 골프와 테니스가 압도적 관심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가 한번쯤 도전해보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알 것이다. 이 두 스포츠, 특히 골프에는 만만치 않은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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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일 오전 서울특별시 유일의 초등 여자 축구팀인 우이초등학교 축구부 선수들이 SKT ICT체험관‘티움’에서 VR 기기를 착용하고 있는 장면[사진 제공=SK텔레콤] |
테니스 역시 골프만큼은 아니지만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꽤 많다. 그런데 사실 축구와 풋살을 위한 준비물은 축구화와 운동복만 있으면 된다. 물론 경기 규칙을 알아야 하고, 기술을 습득하기는 해야 한다. 그래도 축구는 어느 정도만 알면 바로 실전 투입이 가능하고, 그 실전을 통해 다시금 실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낮은 스포츠라는 의미다. 여기에 축구는 함께 호흡하고, 숨을 토해내는 즐거움을 전한다.
이제 여성 축구 및 풋살이 대중화 됨에 따라 이를 위한 다양한 플랫폼이 마련되고 있고, 심지어 기업들의 후원도 줄을 잇고 있다. 지금 당신이 축구에 관심이 있는 팬이라면, 행여 직접 볼을 차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면 바로 검색해보라. 주변에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이 꽤나 많다는 것을 확인하
게 될 것이다. 2024년의 현재 여성 축구 지형도가 그만큼 넓어져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제 축구는 경기 관람뿐만 아니라 패션 아이템이 되었고, 심지어 실천적 행위를 위한 모든 이의 생활 스포츠가 되고 있다.
[글 이주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사진 및 일러스트 픽사베이, 게티이미지뱅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2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