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차 베테랑 배우 배종옥에게도 '치매 걸린 촌로'는 도전이 될 법했습니다.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정책보좌관 출신으로 야당 대표가 된 입지전적 인물인 '윤찬경'처럼, 지적인 엘리트 캐릭터가 찰떡같이 어울리는 그이기에 내심 망설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연기에 대한 갈증으로 흔쾌히 수락했다는 배종옥은 "언젠가는 할 역할이었고, 이게 끝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레(10일) 개봉을 앞둔 영화 '결백'에서 그는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농약 탄 막걸리를 마신 주민들이 숨지는 사건의 용의자가 되는 '채화자'를 연기했습니다. 급성 치매에 걸린 그는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래전 집을 떠났다가 유능한 변호사가 되어 돌아온 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는 실제 뉴스에 등장했던 농약 살인 사건에 관심을 갖던 중, 그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결백'의 시나리오를 받았습니다.
"내가 맡게 될 역할과 상관없이 시나리오 자체를 재밌게 읽었어요. 그렇게 단숨에 읽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제 역할보다는 시나리오, 작품 자체를 보고 결정했어요."
남성 캐릭터가 주류를 이루고 여성 캐릭터는 한정적인 상황에서 세대가 다른 두 여성 배우가 작품을 끌고 나간다는 의미에서도 "굉장히 반가운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치매 걸린 화자는 딸 정인(신혜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픈 아들만 챙깁니다. "작품 속 관계를 촬영 현장에서도 유지하는 게 감정에 도움이 된다"며 "밥도 같이 먹지 않고 낯선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두세 시간이 걸리는 노역 분장 과정을 "채화자라는 인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내 지켜봤다"는 그는 "채화자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내가 채화자로 보이게 하는 게 가장 큰 숙제였다"고 했습니다.
영화 시사회가 끝나고 열린 간담회에서 허준호는 "(배종옥과 신혜선) 두 분의 팬이 된 영화다. 감동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두 배우의 연기를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자신 있게 추천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배종옥은 "이번 영화를 통해 듣고 싶었던 말은 허준호 씨한테 다 들은 것 같다. 다 얘기해 줘서 고맙더라"며 웃었습니다.
허준호와 로맨틱 코미디를 하고 싶다는 의지도 강하게 피력했습니다.
"너무 멋있게 늙지 않았나요? 그렇게 멋있게 나이 드는 동기, 선후배들을 보면 늙는 게 두렵지 않은 것 같아요. 기회가 된다면 허준호 씨와 로맨틱 코미디를 하고 싶어요. 이건 꼭 써주세요."
연기 생활 35년 차, 어느덧 현장에서 '대선배'가 됐다. 신혜선은 처음 호흡을 맞춘 배종옥을 두고 "순수한 배우의 열정을 갖고 계시다"며 "아직도 해보고 싶은 역할이 많다며 힘든 촬영에도 힘든 내색을 안 하신다"고 했습니다.
"연기할 때가 제일 행복하고, 살아있는 것 같아요. 내가 제일 잘하는 거니까. 젊었을 때보다는 체력이 달리니까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고, 슬럼프도 있었지만 일하는 게 행복하니 끊임없이 달려오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 그에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코믹 연기입니다. 중·노년 배우들을 망가뜨리는 게 장기인 김병욱 시트콤(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도 그는 얄미울 정도로 똑소리 나고, 진지했습니다.
그는 "제가 진지하게 웃기는 애라는 걸 감독이 알았던 것 같다"며 "그 역할을 지금 준다면 더 열심히 잘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배종옥은 드라마 '라이브'에서 함께 연기했던 배성우를 꼽으며 "진지했다가도 단어나 눈짓 하나로 사람을 탁 웃기게 한다"며 "나중에 코믹 역할이 들어오면 배성우 씨한테 물어보러 가겠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학구파'
"그러고 보면 나는 자유로운 게 아닌 것 같아…"라며 잠시 자책하는 듯하더니, 이내 "이제 그걸 보여드리겠습니다!"라며 신인 배우처럼 눈을 반짝이기도 했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