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바라 크루거 '무제(충분하면 만족하라)' |
서울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입구 유리벽에 붙어있는 한글 8자는 발걸음을 옮겨야 모두 읽을 수 있다. 글자당 크기가 가로 2.6m, 높이 6m에 달해 시야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검은 바탕에 도드라진 흰색 글귀는 무슨 의미일까, 누구를 향한 것일까. 정답은 없다. 소비 지상주의와 욕망을 겨냥한 비판이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짧지만 울림이 깊고 강렬한 문장이다.
40여년간 세상의 부조리에 시적인 '돌직구 메시지'를 던져온 미국 개념미술가 바바라 크루거(74)가 아시아 첫 개인전에 첫 한글 작품 '무제(충분하면 만족하라)'를 펼쳤다. UCLA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인 제자들을 통해 알게된 한글의 조형성에 반한 그가 먼저 미술관에 제안했다고. 전시장에선 또 다른 한글 작품 '무제(제발웃어제발울어)'가 기다린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감정을 억제당하는 현대인을 위한 호소인지, 정서가 메마른 인간을 향한 명령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문장 의미 역시 열려 있다.
↑ 바바라 크루거 '무제(영원히)' |
타원형 볼록 거울에는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수필집 '자기만의 방'에서 발췌한 문장 '지난 수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원래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력을 가진 거울 같은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가 들어가 있다. 울프가 가부장제와 성적 불평등에 맞서 20세기 페미니즘 비평을 연 책 내용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경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큐레이터는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작품 의미는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 바바라 크루거 '무제(당신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 |
미국이 낙태법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1989년에는 여성 얼굴 이미지에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를 붙인 작품으로 비판했다. 남성우월주의를 비꼬는 '무제(우리는 더 이상 다른 영웅이 필요하지 않아)' 연작도 페미니즘 예술을 선도했다.
↑ 바바라 크루거 '무제(당신의 몸은 전쟁터다)' |
손가락 이미지, 빨간색 바탕에 흰색 글씨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소비지상주의를 극명하게 압축했다. 실험실 도구 이미지에 '당신의 광기가 과학이 된다'는 핵실험을 비난한 작품이다. 시를 사랑하고 잡지사 편집 디자이너로 10여년간 일한 작가의 이력이 보태져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확 끄는 문장과 이미지를 잘 골라낸 것 같다. 핵심을 찌르고 날선 언어로 가득찬 초기작부터 최신작 44점을 보고 나면 당신 안에 눌러놨던 비판 정신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태어난 크루거는 시러큐스대학을 다니다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로 옮겼으며 잡지사 콩데 나스트에서 일했다. 작가로
미국과 영국에 대규모 회고전이 예정된 그가 아시아에 다시 오기 어려워 이번 기획전 '바바라 크루거: 포에버(Forever)'는 12월 29일까지 이어진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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