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진하는 여자의용군. [사진 = 국가기록원 제공] |
사단법인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시민연대는 25일 대학생 단체 U-Turi와 함께 '여성 의용군 알리기 캠페인'을 계획했다고 밝혔다.
U-Turi 소속 대학생 6명은 이날 오후 경복궁 일대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피켓 안내와 각종 이벤트를 진행해 여자 의용군의 존재를 알릴 예정이다.
여자 의용군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가 대전으로 이동했을 때 육군 대령이던 김현숙(1915∼1981·여)의 뜻으로 탄생했다.
그는 "여자도 나라 지키는 일에 예외일 수 없다"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자 의용군 모집을 건의하고 1950년 8월 직접 여자 의용군 모집 담화를 발표했다. 이후 2000명의 지원자가 몰리자 정부는 부산 제2훈련소 예속으로 여자 의용군 교육대를 설립했다. 김 대령은 초대 교육대장에 취임했다.
당시 모인 이들은 18~25세의 중학교 이상 대학교 학력 소유의 미혼 여성들이었다. 구두 시험과 필기 시험을 거쳐 합격한 500명의 여자 의용군은 남성들과 동일하게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낮에는 무기 사용법을 배우고 야간에는 포복 훈련을 실시했다. 지독한 교육과 훈련을 거쳐 1951년 1월 10일, 9명의 낙오자를 제외한 491명이 전방에 배치됐다. 사실상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이 된 것.
↑ 훈련 받는 여자의용군. [사진 = 국가기록원 제공] |
1951년 1·4 후퇴 당시 신분 위장 중에 유격대 활동을 전개하거나 각 전투부대에서 전쟁에 참여했다. 북한군을 귀순시키거나 전장에서 투항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대민 선무, 부대 정훈 등의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이들은 여군이라는 개념이 익숙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인민군 포로'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다. 부대에 여성 숙소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경우 피난지 민가에 머물렀다. 군복과 군화 또한 작게 나온 남성용을 접어 입거나 신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자부심 덕분이었다.
이인숙 여자 의용군 참전용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자부심은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며 지금 세대의 젊은이들이 6·25 전쟁을 잊지 않고 선조의 희생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여성 의용군 알리기 캠페인'을
[디지털뉴스국 문혜령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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