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훈정 감독이 전혀 다른 결의 누아르 `브이아이피`로 돌아왔다. 제공|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V.I.P(브이아이피)’ 박훈정 감독은 스스로를 ‘누아르 덕후’라고 칭했다. ‘신세계’의 짙은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결의 누아르 ‘브이아이피’를 선보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박 감독은 “정통 누아르의 틀을 깬, 전혀 다른 색깔의 누아르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면서도 “막상 개봉을 하니 관객들이 낯설게 느낄까봐 걱정이 앞선다. 괜한 투지였나 싶기도 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마침 영화가 해봉하는 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훈정 감독. “개봉 전부터 예매율 1위더라. 관객들의 반응이 좋다던데, 소감이 어떠냐”라고 물으니, “한동안 인터넷을 끊고 지내기로 결심했다”며 특유의 재치 있는 답변을 해왔다.
‘브이아이피’는 국정원과 CIA의 기획으로 북에서 온 VIP가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상황에서 이를 은폐하려는 자, 이용하려는 자, 반드시 잡으려는 자, 복수하려는 자 등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범죄 누아르다. VIP 이종석을 비롯해 장동건 김명민 박희순 등 충무로의 신구 스타들이 한데 출연해 양보 없는 연기 대결을 펼친다.
특히 출연 배우들은 “영화의 타이틀 롤을 맡은 이종석에 대한 박 감독의 사랑이 남달랐다. 우린 안중에도 없었다”며 입을 모아 농담 섞인 질투를 보였다. 박 감독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니 “본인들은 워낙 다 알아서 잘하니까 특별히 내가 해 줄게 없었을 뿐”이라며 “(변명을 하자면)이종석의 경우는 본인이 도전의 의미가 컸기 때문에 스스로 불안해하고 어려워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에 더 긴밀하게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우리 영화 타이틀 롤이 이종석 아닌가. 다른 캐릭터가 다 죽더라도 V.I.P 김광일(이종석)만 살면 기본은 한 것”이라고 농을 던져 웃음을 안겼다.
“기본적으로 캐릭터 보단 사건 중심의 영화라서 각 인물의 얽힌 전사나 설정 등이 크게 중요하진 않았어요. 배우들에게 핵심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60% 정도만 완성해 알려주면 나머진 각각의 배우들이 저마다의 해석을 통해 완성시키는 작업이었죠. 배우들이 공식석상에서 ‘불친절한 시나리오, 디렉션이었다’고 말하던데 당시에는 분명 ‘엄청 재미있다’고 했었어요.(웃음) 워낙 다 잘하는 배우들이라 제가 특별히 지시할 것도 없었고요. 결과물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다들 너무나 잘 해줘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이번 작품의 가장 큰 반전 캐스팅은 바로 이종석. 희대의 악역인 ‘김광일’로 분한 그는 북한 최고 고위층인 아들 역으로, 귀공자의 얼굴 이면에 잔인한 살인 본능이 숨겨져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하나의 취미생활 정도로 여기는 인물이다.
박 감독은 “사실 보통의 젊은 스타 친구들이 말로는 ‘남성적 영화’ ‘센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막상 그런 역할을 제안하면 고민을 많이 한다. 소속사에서도 꺼려하는 분위기”라며 “발굴되지 않은 신인 배우들 가운데 김광일의 배역을 맡을 친구들을 찾고 있던 중 이종석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솔직히 적잖게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 “이종석이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생김새는 내가 생각했던 김광일에 적합하긴 했지만 그 친구가 이런 역할에 도전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워낙 중요한 역할이다 보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친구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연기에 대한 욕심과 성장에 대한 열망이 굉장히 큰 친구더라. 강한 도전 정신과 진중한 모습에 믿음이 가더라”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내 선택은 탁월했다”고 엄치를 치켜들었다.
영화의 또 하나의 큰 반전은 ‘신세계’와는 정반대 ‘누아르’라는 점.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정통 ‘누아르’의 모든 특징을 다 깨부쉈다. ’기획 귀순자’란 신선한 소재를 가져와 전혀 다른 세계관을 보여준다. 범죄 영화의 필수 요소로 여겨졌던 조폭이나 인물 간 케미는 없다. 거대하고 강력한 공권력을 가진 시스템이 각각의 이해관계, 정치적 관계 등을 이유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느닷없이 등장한 괴물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 박훈정 감독은 이종석 캐스팅이 탁월한 선택이라고 했다. 제공|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이어 “처음 김명민 배우가 작품 시나리오를 읽고, 나의 연출 방향을 듣더니 ‘많은 이들이 전작 ‘신세계’를 기대하고 비교할 게 뻔한데 왜 굳이 이렇게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하시냐. 영화제를 노린 것이냐’라고 하더라. 물론 다 아는 말이지만 누아르를 사랑하고, 이 분야에 그래도 자신 있는 나로서는 분명 다른 것도 보여주고 싶은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기본적으로 극장에서 어떤 영화가 개봉한다고 할 때 ‘보고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를 만들고 싶고, 그러려면 내가 잘 알고 좋아하는, 나조차도 궁금하고 흥미가 가는 작품을 만들어야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에서 이번 작품을 선보이게 됐어요. ‘부조리’에 대한 저의 시선과 ‘관계’라는 복잡한 명제,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된 주변의 상황들을 누아르라는 장르 안에서 그려냈죠. 물론 막상 관객들과 대면하니 온갖 생각이 다 들긴 하지만(웃음). 분명한 건 전작 ‘신세계’와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즐겨주신다면 충분히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거예요.”
끝으로 그는 “때때로 사람들이 내게 ‘삐딱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고들 한다. 인정한다”면서 “소위 우리가 ‘V.I.P’라고 칭하는, 단어가 지닌 사전적 의미 그 이상의 과대 포장된 다면적 의미들에 대한 불편한 시각도 분명 깃들어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개개인의 사람들은 다 양심을 갖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 만든 집단과 조직은 양심이 없죠. 그런 상황이 재밌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하더라구요. 그래서
‘브이아이피’는 23일 개봉해 현재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청소년관람불가. 러닝타임 1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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