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경북 영양군 태생인 남 명예회장은 1957년 남영비비안을 설립하여 오늘날 국내를 대표하는 속옷업체로 키워냈다. 그는 1950년대 여성들에게 서양식 의복이 점차 익숙해지면서 좀 더 예쁜 맵시를 위해서는 여성 속옷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일찌감치 속옷 사업에 뛰어들었다. 고쟁이나 광목으로 된 속옷을 착용하던 당시 여성들에게 브래지어, 거들 등 란제리를 소개함으로써 의생활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한국 무역 산업을 일으킨 무역 1세대이기도 하다. 1954년 무역 회사인 남영산업을 통해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 속옷과 스타킹을 수출했다. 일본기업이 장악하고 있던 미국 시장을 공략해 큰 성공을 거뒀고, 1980년대에는 미국 시장에 연간 800만 장의 브래지어를 수출했다. 당시 미국 여성 10명 중 1명이 남영산업이 수출한 브래지어를 입은 셈이다.
1970년대에는 홍콩 스타킹시장의 30%를 점유했다. 그는 국내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 주목하기 전인 1992년에 이미 중국에 속옷 생산 법인을 설립했다. 1989년 인도네시아에도 현지 법인을 설립해 현재까지도 운영하고 있다.
그는 한국 수출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장례식장 17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1일 오전, 장지는 경기도 화성 선산이다.
[박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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