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휴가에서 돌아온 아나운서 손미나(43)는 스페인으로 훌쩍 유학길을 떠났다가 방송국을 그만 뒀다. 그리고 여행 작가의 삶을 시작했다. 지금 그녀는 손미나앤컴퍼니의 대표 겸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편집인, 그리고 인생학교의 교장선생님이다. 지난 14일 서울 이태원에 있는 인생학교에서 만난 손 대표는 “초등학생 때 유별나게 어른스러워서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교장선생님이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라며 웃었다.
지난 10월 개교한 인생학교는 스위스 출신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이 2008년 영국 런던에 세운 인생학교(The School of Life)의 서울 분교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등지에 인생학교가 세워졌고 서울은 아홉 번째다. 문학과 철학, 예술 등을 통해 다양한 삶의 질문들을 함께 고민하고 해답을 모색한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법’,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법’, ‘가족과 더 행복하게 사는 법’처럼 일상 속 고민거리가 수업 주제다.
손 대표는 인생학교에 대해 “영혼의 찜질방”이라고 설명했다. “일이든, 관계든, 목표든 정답은 없지만 살면서 한번 씩은 던져야하는 삶의 문제가 있잖아요. 찜질방은 치료를 위한 공간은 아니지만 몸 속 노폐물을 배출하고 개운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곳이죠. 인생학교가 그런 곳이 됐으면 해요.”
‘찜질방’이란 설명에 걸맞게 인생학교 내부는 온돌의 온기가 올라와 따뜻했고, 빗방울은 중정(中庭)의 나뭇잎을 투두둑 스치며 떨어졌다. 손 대표는 “보통이 이곳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했다”고 했다.
보통과 손 대표의 인연은 20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두 사람은 한 시간으로 잡힌 일정을 훌쩍 넘겨 세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 손 대표는 “그때 보통은 ‘박사학위를 따고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연인과 화해하는 게 가장 어렵다. 외로움, 늙음, 죽음 모두 마찬가지다. 인생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보통은 인생학교를 세워 운영하는데 몰두했고, 손 대표는 작가로 편집인으로 바쁘게 살아왔다. 친구 사이가 된 보통에게 한국 파트너가 될 만한 이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러다 인생학교의 한국 파트너가 됐다. “처음엔 여행자로 지내면서 글 쓰면서 살겠다고 생각해서 인생학교 일은 생각도 안했어요. 하지만 회사도 꾸리게 되면서 인력도 생겼고, 주변에서도 직접 맡아보라는 제안이 나와서 도전하게 됐죠.”
개교 두 달째인 인생학교의 성과는 놀랍다. 거의 매일 잡혀있는 수업마다 마감이다. 손 대표는 “영국 본교에서도 정착하는 데 몇 년이 걸렸는데, 분에 넘치는 반응과 기대를 받고 있다”며 “11월 초 수강신청 때는 신청자가 몰려 서버가 다운 됐었는데, 직접 돈을 들고 찾아오신 분도 있었다”고 했다. 어떤 수강생은 수십 장 분량의 피드백을 보내오기도 했고, 좋은 일 한다고 보약을 지어다준 사람도 있었다.
손 대표도 인생학교에서 ‘가슴 뛰는 직업을 찾는 법’과 ‘선택 잘 하는 법’이란 주제로 수업을 한다. 그는 “수업 때마다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눈다. 매일 스무 명의 새로운 사람과 데이트를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생학교가 붐은 아니더라도 잔잔한 물결처럼 계속 스며들어 세상을 바꾸는 움직임이 됐으면 좋겠다”며 “빈곤층, 미혼모, 재소자 등을 위한 출장수업이나 지방 분교를 운영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학교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그는 신간 여행 에세이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예담)을 냈다.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페루로 떠났다. “생전에 아버지께서 페루를 가고 싶어 하셨고, 산 자와 망자(亡者)의 영혼을 이어주는 콘도르에 대한 말씀도 하셨어요. 페루는 마치 살풀이처럼, 가까운 이를 떠나보내고 상심한 이들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곳이에요.”
손 대표는 20년차 방송인, 10년차 작가, 2년차 사업가를 거쳐 인생학교 교장으로 막 두 달을 넘겼다. 다양한 변신에 성공한 그에게 열정의 근원을 묻자 ‘호기심’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성격이 그렇다. 궁금한 게 있으면 꼭 알아내야 하고, 될까 안 될까 고민한 적이 없다. 내 안에 있는 것들 중 어떤 게 싹을 틔울지 모르니까 이것저것 꺼내보고 도전해보게 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제까지 쌓아온 경력을 왜 버리냐고 묻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해온 일들을 단절하고 다른 영역으로 점프한 게 아니라, 해온 걸 바탕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시야를 넓힌 결정이었다”고 덧붙였다.
“서어서문학과에 진학해서 라틴 문화를 내 것으로 체화(滯貨)하는 과정이 지금의 인생관을 만든 것 같아요. 어차피 인생은 걸음마다 미지의 길이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어차피 다 두려운 선택인 걸 아니까 도전하는
그녀가 긴 길을 돌아오고, 인생에 쉼표를 찍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온 까닭은 ‘넌 행복하니’라는 인생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손 대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럼요. 정말로, 완전히 행복해요.”
[홍성윤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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