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강도높은 기업구조조정 원칙을 밝힌 후 사실상의 첫 사례인 대우조선해양의 구조조정이 표류하고 있다. 부실원인을 과감하게 들어내는 근원적인 처방 대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자원지원만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내년 선거를 의식하고 채권단은 손실을 떠안지 않으려고 미봉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대기업 노조는 실속 챙기기에 나서면서 배가 산으로 가는 모양새가 연출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해지면 정부가 준비중인 좀비기업 구조조정도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26일 금융권과 조선업계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 노조는 이날 회사 정상화 시점까지 임금동결과 부분파업 등 쟁의행위 자제를 요구하는 산업은행과 정성립 사장 등 회사 경영진의 제안을 놓고 회의를 열었다. 대우조선 관계자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긍정적으로 논의가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산업은행은 이같은 자구안에 대한 노조의 동의서를 정식으로 제출받는 대로 이르면 이번 주 안으로 은행 이사회를 열고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신규자금 지원안을 논의·의결할 예정이다. 이 경우 대우조선에 대해 4조3000억원의 자금이 지원되고 회사는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를 갚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정도 수준의 자구안과 이에 대한 노조의 동의만으로 막대한 신규자금 지원을 단행하는 것은 구조조정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장관급 관료는 “대우조선해양의 구조조정 작업이 산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주주, 경영진 노조에 대해 기업부실에 대한 책임을 엄중하게 묻고 새로운 구조조정 방안을 짜지 않고 임시 자금만 계속 지원한다면 결국 구조조정 없이 돈만 낭비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현재 대우조선과 조선업계에 필요한 것은 글로벌 과잉공급 문제를 이겨내고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수술이다. 대우조선의 경우 유상증자나 합병 등을 통해 새로운 주인을 찾아준 이후 새 주인이 강도높은 구조조정과 자금 투입 등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게 조선업계와 금융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또 중소형 조선사들도 통폐합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않는다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경고도 나온다.
채권단과 경영진, 노조, 주주 등 이해관계자 의견이 첨예한 상황에서 구조조정 방향에 대한 결단을 내리고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주체는 정부가 될 수 밖에 없다. 한 금융투자(IB)업계 관계자는 “업황이 좋지 않아 조선업체에 대한 관심이 전무한 상황에서 기업 인수·합병과 통폐합 작업 등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부가 인수 후보자 찾기에 나서고 구조조정에 앞장 서야 한다”며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 논리에 매몰돼 구조조정을 미룬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
한편 감사원은 산업은행의 자회사 관리 실태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26일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 대한 감사에 들어갔다. 산은 자회사 관리실태에 대한 감사원 감사는 12월초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특별취재팀 = 노영우 차장 / 박준형 기자 / 전범주 기자 / 정석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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