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4일은 최동원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된 날이었다. 최동원기념사업회는 이날 그의 고향이자 영원한 안식처인 사직구장 앞에 ‘무쇠팔 최동원’ 동상을 세웠다. 죽고 나서 이럴 게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좀 더 관심을 가져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지만 뒤늦게나마 한국야구의 ‘위대한 전설’을 기려주니 다행이다.
최동원의 화려한 성적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야구장 밖에서의 최동원은 과연 누구였을까. 한 마디로 그는 ‘혁명가’였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일을 그는 행동으로 옮겼다. 그가 당대 최고 투수였기 때문이었을까? 고액 연봉자였기 때문에 앞장섰을까?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굽히는 법이 없는 ‘끓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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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최동원은 경기도 물왕저수지 해병대캠프로 극기훈련을 떠났다. 이 때가 선수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 |
최동원은 한국 운동선수 가운데 최초로 자신의 몸을 상해보험에 가입한 인물이다. 그것도 고등학교 2학년 신분으로 말이다. 1975년 경남고 2학년인 최동원은 그 해 가을 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청룡기와 봉황대기 우승팀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이튿날 선린상고와의 경기에서도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이어가 ‘17이닝 노히트노런’이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 대회가 끝난 뒤 최동원(엄밀히 말하면 그의 부친인 최윤식씨)은 오른쪽 어깨를 상해보험에 들어 야구계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사회 전체를 들었다 놨다.
이에 앞서 금테안경을 끼고 마운드에 오른 첫 번째 선수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당시로선 고정관념을 깬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연세대 3학년인 1979년. 최동원은 다시 한 번 야구 외적인 문제로 큰 주목을 받는다. ‘단체 기합’에 반발해 숙소를 이탈한 것이다. 최동원은 “이런 구시대적 문화가 남아 있는 연세대에서는 야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당시 ‘단체 기합’의 가해자가 공군 전역 후 복학한 박철순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무엇보다 최동원을 ‘혁명가’로 기억하는 가장 큰 사건은 선수협 창설과 그 이후 이어진 질곡의 인생이다.
1988년 9월 13일이었다. 최동원을 비롯한 프로야구 7개 구단 선수 130명은 대전시 유성관광호텔에서 프로야구선수협의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초대 회장은 최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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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은 이미 오래 전부터 프로야구 선수들의 권리와 복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수협 창설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겼다.
구단과 한국야구위원회(KBO)의 강력 반발에 부딪쳐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금의 선수협회가 뿌리내린 덴 최동원의 공로가 절대적이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국내 4대 프로스포츠 가운데 유일하게 선수들의 목소리를 내는 기구를 갖고 있다는 데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최동원은 선수협 ‘주동자’로 낙인이 찍혀 1988년 11월 23일 롯데에서 쫓겨난다.(트레이드를 빙자한 방출이었다) 그 때 최동원의 롯데 방출에 대해 유일하게 제 목소리를 낸 사람은 이광환(서울대 감독)이었다. 모든 야구인, 해설가, 언론들이 구단 눈치를 볼 때 OB 베어스 감독인 이광환만은 “이건 팀 전력상승을 위한 트레이드가 아니라 선수를 버리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최동원의 선수수명은 사실상 그렇게 끝났다. 1990년 은퇴한 최동원은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다.
1991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부산 서구 광역의원에 출마한 것이다. 그것도 3당 합당으로 맘모스 정당이 된 민자당의 집요한 공천제의를 뿌리치고, ‘꼬마 민주당’ 소속으로. 보기 좋게 미끄러졌지만 그만의 ‘꼿꼿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최동원은 평생 외로운 길을 갔다. 최고였을 때도, 오갈 곳 없어 야구판을 기웃거릴 때도 그는 항상 혼자였다. 야구
한국야구사를 통틀어 최고 선수 단 한 명을 꼽으라면 누굴까. 많은 사람들은 ‘최동원’이란 이름 석 자를 주저 없이 꼽을 것이다.
[매경닷컴 MK스포츠 김대호 편집국장 dhkim@maekyung.com]
사진제공=장원우 전 주간야구 사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