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한해 앞서 개봉한 영화 ‘황해’도 생각났다. 배우 하정우가 엄청나게 고생한 작품. 그는 1년간 로션도 바르지 않고, 피부가 망가지도록 내버려뒀다. 험난한 산을 타고 얼음장 같은 겨울 바다에 풍덩 하고 빠지기도 했다.
지난 21일 서울 성동구 행당동 왕십리 CGV에서 열린 ‘베를린’ 시사회를 보러 영화관에 들어섰을 때와 영화의 첫 장면 느낌은 이처럼 긍정적이진 않았다. 류승완 감독, 한석규, 하정우, 전지현 등이 함께하는 100억 원대 규모의 블록버스터를 향한 관심에 좌석은 부족했고, 첫 장면부터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하정우를 보니 문득 떠오른 과거다.
하지만 120분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뒤 ‘베를린’은 한국형 ‘본’을 표방해도 무방할 듯싶었다. 배우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 총격전, 맨몸 결투 등이 눈길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다. 오프닝부터 강렬하다. 초반 액션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놀라기엔 이르다. 하정우가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액션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정우는 이날 오후 시사회가 끝난 뒤 서울 강남 압구정의 한 술집에서 기자들과 만나 “‘베를린’은 ‘황해’ 전체를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는 말로 고생한 과거를 표현했다. 짧은 시간에 고된 촬영을 했고, 큰 부상은 없었지만 작은 부상이 잦았다. 해외 로케이션을 떠나기 전 액션스쿨에서 훈련과 연습 과정을 거쳤으나 실전에서는 또 달랐다.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촬영도 여러 날이었다.
실제 영화를 보면 엄청나다. 하정우는 달리는 차에 몸을 내던지고, 상대의 무자비한 발길질도 감내해야 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건 기본, 돌에 찍히고 유리창을 통해 고꾸라진다. 특히 자신의 아파트에서 한바탕 격투를 벌이고 유리창을 통해 도망치다 여러 가닥의 뒤엉킨 줄에 걸려 떨어지는 장면은 압권이다.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처음으로 외국 촬영에 도전한 류승완 감독은 “외국 스태프와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복잡해 힘들었다”고 토로했지만. 그런 고단한 과정을 이기고 나온 영화에 만족하는 듯한 눈치다. 그의 동생인 배우 류승범은 이번에도 자신의 독특한 색깔이 드러나는 일명 ‘양아치 연기’에 즐거워했다. 북한 고위간부마저 ‘양아치처럼 표현한다’는 평가에 “내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 부분에 한 획을 근 것 같다”며 “70세가 되어서도 그런 연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웃었다. 그는 또 높은 위치에 있더라도 자신이 표현하는 캐릭터들이 사람들에게 패배감을 주지 않는 것 같아 좋아해 주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고 짚었다.
한석규의 말은 이 영화를 더 기대하게 하기 충분하다. 한석규는 “작품을 통해 자주 인사를 드리지는 못할 것 같지만 가끔 정말 내 100%를 끌어내 보려는 작품으로 만나려 한다”는 말로 ‘베를린’을 향한 믿음을 전했다. 온 힘을 모아 쏟아낸다는 그는 이미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를 증명했다.
류승완 감독은 언론 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안 좋다는 얘기를 들으면 순전히 내 잘못이니 욕 안 먹으려고 잠을 설친 것 같다”고 했는데 이제는 발 뻗고 잘 수 있지 않을까. 정작 중요한 관객의 평가를 아직 받지 못했지만 ‘베를린’은 그의 노력과 열정을 제대로 증명할 듯하다.
한편 ‘베를린’은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도시 베를린을 배경으로 각자의 목적을 위해 서로가 표적이 된 비밀요원들의 미션을 그린 영화다. 하정우가 ‘고스트’라 불리는 비밀요원 표종성, 한석규가 국제적인 음모와 배후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국정원 요원 정진수, 류승범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베를린을 장악하러 온 북한의 동명수, 전지현이 표종성의 아내이자 베를린 대사관 통역관 련정희를 연기했다. 31일 개봉 예정.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현철 기자 jeigun@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