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제 2시 신도시 시간에는 최근 신규 분양마다 시끌시끌했던 ‘위례신도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알아본다.
위례신도시 개발 사업은 2005년 8월 31일 부동산 종합대책에서 강남지역 주택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이 지역의 그린벨트와 주둔 군부대지역 등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해 시작됐다. 오는 2017년까지 10만여 명이 거주할 주택 4만2000채가 들어선다.
↑ [2011년 촬영된 위례신도시가 들어설 서울 송파구 장지·거여동, 성남 창곡동, 하남시 학암동 일대. 출처 매경DB] |
또한 타 사업과는 달리 개발대상 위치가 3곳의 행정구역이 합쳐지는 복잡한 사업으로 서울시 송파구 거여동과 장지동, 경기도 성남시 창곡동과 복정동, 하남시 학암동과 감이동 일원이 그 대상이다.
서울을 지키는 것이 숙명이었던 ‘송파’
서울시의 동남단에 위치한 송파구는 북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광진구와 서쪽으로는 탄천을 경계로 강남구와 인접하고, 동으로는 강동구와 남한산성을 배경으로 경기도 하남시와 남쪽으로는 경기도 성남시와 접하고 있다.
송파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이 지역에 있었던 송파나루에서 유래됐다. 또 옛날 한강변에 있던 이 마을의 언덕을 중심으로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 차 있어 소나무언덕, 즉 송파(松坡)라 불렀는데, 18세기 정선이 그린 ‘송파진도’를 보면 언덕에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는 것이 묘사되어 있어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보고 있다.
↑ [송파구 풍납토성 추정지역,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출처 매경DB] |
초기 백제의 왕도(王道)로 추정되는 풍납토성과 인근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자료이며 나아가 하남의 이성산성이나 석촌동에 있는 적석총, 방이동의 고분군 등도 백제가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송파는 임진왜란과 함께 조선왕조 최대 외침이었던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청의 강요에 의해 청태종공덕비(삼전도비)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 또 백제의 시조 온조왕부터 21대 개로왕까지 약 493년간 백제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4세기 후반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후반까지 한강유역은 백제(하남위례성 및 한성), 고구려(남평양성), 신라(한산주, 남한산주, 한주)의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지역이다.
지금의 석촌호수에 있던 송파나루터는 고려와 조선왕조에 이르는 천년동안 한성, 충청도, 경상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상업의 교통로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어 조선 후기에는 송파장이 매우 큰 장터였다. 한반도의 동남쪽으로 올라오는 상품들은 이곳 송파장에 모였고 서울의 경강상인들과 연계되면서 조선후기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따라서 송파장은 전국 각 지방의 산물이 집산되는 중심지로 5일장이 아닌 상설점포가 일찍부터 형성됐으며 조선시대 15대 장터 중의 하나였다.
수도권 중동부 교통의 요지, ‘하남’
삼한시대 부여와 고구려의 유민이 하남지역에 정착해 건설한 백제는 이후 삼국의 쟁패지역으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가 한수 이북에 도읍을 정했으나 낙랑, 말갈 등의 침략이 잦아 지금의 하남으로 천도하면서, 이곳을 세력권내에 두고 있던 마한을 물리치고 백제국을 건설하게 됐다고 전한다.
지금의 광주지역이 ‘광주’로 불린 것은 고려 동왕23년(940)에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부터다. 당시 광주는 12목 중의 한곳으로써 읍지는 지금의 고골(춘궁동)이었다.
조선시대에 하남은 남쪽에서 올라오는 물품들의 주요한 수송로로써 이용됐고, ‘광주향교’는 그 시절 건립된 것으로 당시 광주부의 향교로써 춘궁동에서 1703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을 지키기 위한 격전지로써 원두표 장군이 호군의 양고리를 전사시킨 곳이기도 하다.
정책적으로 개발된 인공도시 ‘성남’
우리나라 처음으로 특수한 목적 하에 정책적으로 개발된 인공도시인 성남시는 한국 현대사의 급발전, 급팽창이라는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도시로 이전까지는 광주군에 포함되어 그 역사를 함께했으며 1960년대 이전까지 광주시와 같은 역사적 범위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남한산성 서쪽 비탈면을 따라 형성된 계곡사이의 평지에 조성된 창곡동은 창말, 매착리, 군인아파트, 간이골 등 4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시기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 시조 온조왕이 기원전 6년 하남 위례성으로 수도를 옮긴 후 군사들을 훈련하면서 창말에 창고를 짓고 군량미와 병장기를 보관하였다는 구전(口傳)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포병부대와 말목장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육군교도소가 이곳에 만들어졌고, 위례신도시를 계획하기 바로 전인 최근까지도 상무대, 행정학교, 문무대 등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군사시설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마을이다.
[자문 JNK 개발원 정인택 원장 / 정리 이미연 기자]
[참고] 정인택 원장은 現 JNK 개발원 원장으로 사단법인 도시경영 포럼 부회장과 前 서울시 도시정비과, 한국토지공사 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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