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스타 유아인, 아니 인간 엄홍식이 자신만의 소통법으로 연일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며 SNS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을 서슴없이 털어놓는 그. 때로는 거친 비난 속에서 격한 설전을 이어가며 논란의 중심에 서는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 같은 방식을 택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유아인은 지난 26일 일각의 누리꾼들과 몇일 간의 설전 끝에 “나는 ’페미니스트다’”로 시작되는 장문의 글을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했다.
그는 “집단 난독증을 앓고 있는 신(新) 인류에게는 매우 길고 어려운 글이 될 것이고, 글을 통해 사람을 보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숭고한 일이 될 것이다”는 서문을 담은 해당 글에서 “나는 ‘엄마’라는 존재의 자궁에 잉태되어 그녀의 고통으로 세상의 빛을 본 인간이다. 그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서 뻔뻔하게 살아갈 재간이 없다. 우리 엄마는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 아들이어서 귀한 게 아니다. 딸이라고 비천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아들딸들이, 모든 부모의 자식들이 다 귀하고 존엄하다”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성’에 대한 가치관들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그러면서 “차별없이 모든 다른 존재들과 기술을 통해 연결되고 싶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 안에서 진정한 관계를 갖고 싶다”며 활발한 SNS 활동에 대한 궁극적인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는 “전통적 역사에서 다른 유형의 인간들이 전쟁과 지배의 역사에서 생물학적 기능과 사회적 역할의 차이를 차별로 전환했다”면서 “이제는 전통적인 전쟁에서 벗어나 기술로 만들어진 신세계에서 품앗이하며 평화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
이와 함께 “나는 당신을 이겨내기 위해 힘쓰고 싶지 않다. 당신과 연결되고 싶고 잘 지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앞서 유아인은 지난 24일 오후 트위터 상에서 이뤄진 일각의 누리꾼과의 설전을 벌인 바 있다. 당시 유아인과 언쟁을 펼친 누리꾼들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칭하며 유아인을 여성을 비하하는 한국 남자라고 비난했고, 유아인은 이에 반박 글을 올리며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한 누리꾼은 "유아인은 그냥 한 20미터 정도 떨어져서 보기엔 좋은 사람일 것 같다.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들 것 같음. 막 냉장고 열다가도 채소 칸에 뭐 애호박 하나 덜렁 들어있으면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나한테 ’혼자라는 건 뭘까?’하고 코 찡끗할 것 같음"이라고 글을 남겼고, 유아인이 이에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코 찡끗)"이라고 답글을 남겼다.
이후 그를 ‘한남’이라는 비하적 단어로 부르며 악플을 달았고, 유아인은 “좋은 방법 하나 알려줄게. 내가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돼. 언팔 하면 되고…제발 너네 인생 삻아. 나 말고 너네 자신을 가져가. 관종이 원하는 관심을 기꺼이 줘서 감사하다”는 글을 남기며 격한 공방을 이어간 바 있다.
<다음은 유아인 글 전문>
나는 ‘페미니스트’다. 어떠한 권위가 내게 ‘자격증’을 발부할지는 모르겠으나 신념과 사랑과 시대정신을 담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320자의 트위터나 그림으로 말하는 인스타그램의 부작용으로 집단 난독증을 앓고 있는 신(新) 인류에게는 매우 길고 어려운 글이 될 것이고, 글을 통해 사람을 보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숭고한 일이 될 것이다. 수익과 소득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먹잇감이 되겠지- 아뿔싸!
그들의 가난한 영혼을 차마 다 안을 재간이 없어 비통하다. 자연을 글로 옮기는데 가상세계에서 내 영혼이 다칠까 걱정되어 날선 방패를 먼저 세우는 일이 참으로 비참하다.
그럼에도 쓴다. 경향적 어휘와 자극적 이미지를 총알처럼 남발하며 전쟁을 치르는 세상에서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기에는 내 안의 문학소년이 매우 슬프기 때문이다.
싸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써왔다. 그래서 쓴다. 피눈물로 당신에게 나를 보낸다. 이것이 내 ‘글’이고, ‘나’다. 물리고 뜯기고 찢겨 조각난 채로 이 세계를 부유하는 것들은 글이 아니라 나다. 흥겨워하지 말아라. 익명이 그토록 명예로운가. 기자라는 이름의 명예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배가 아니라, 영혼을 살찌워야 한다.
내 이름은 ‘엄홍식(嚴弘殖))’이다. 내가 짓지는 않았고, 무엇을 심으라고 지으신 지는 모르겠지만 엄할 엄(嚴)에 클 홍(弘)심을 식(殖)을 덧붙여 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나는 보수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구에서 누나 둘을 가진 막내 아들이자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야 할 장남으로 한 집안에 태어나 ‘차별적 사랑’을 감당하며 살았다. 역할은 있었는데 ‘엄홍식’은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자아 찾기 여행의 고난이 눈앞에 펼쳐졌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체는 노화의 속도를 올리고 있지만 정신은 확장을 멈추지 않았으니 그것이 내 중 2병의 당연한 실체다. 나는 항상 삶이 어렵다. 매 순간이 새것이고, 그 시간에 속한 모든 내가 새로운 나여서.
아버지는 나를 ‘똥개’라고 불렀다. 부끄럽지만 아직도 고향에 가면 아버지는 나를 어릴 때의 그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즐겨 하신다. 귀한 아들은 그렇게 불러야 오래 사는 거라고 한다. ‘귀한 아들’
작은누나의 이름은 한글로 ‘방울’이다. 그때까지는 내 조부모들의 귀한 자식들인 내 부모가 가진 자식들이 딸 둘 밖에는 없어서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할머니가 그렇게 지으셨다고 한다. ‘엄방울’ 불쌍하고 예쁜 이름.
제삿날이면 엄마는 제수(祭需)를 차리느라 허리가 휘고, 아빠는 병풍을 펼치고 지방(紙榜)을 쓰느라 허세를 핀다. 일찍이 속이 뒤틀린 소년이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상하고 불평등한 역할놀이’. 제사가 끝나면 엄마는 음복상을 차리고 작은엄마와 누나들은 설거지 같은 뒷정리를 함께 도왔다. 집안의 남자들이 ‘성’에 취해 허세를 피우는 ‘상’에 여자들이 끼어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과 종교의 역사와, 각종 인간 사상이 합작하여 빚어낸 남존여비의 ‘전통’과 그 전통이 다시 빚어낸 인간 사회의 참상은 내 집안에서도 자랑스러운 골동품으로 전시되었다. 유난하고 폭력적인 그 풍경은 뻔뻔하게 펼쳐졌지만 자랑스럽게 대물림되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엄마’라는 존재의 자궁에 잉태되어 그녀의 고통으로 세상의 빛을 본 인간이다. 그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서 뻔뻔하게 살아갈 재간이 없다. 우리 엄마는 해방되어야 한다. 의문들로 뒤틀린 나는 차마 뻔뻔한 그 풍경들을 뻔뻔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런 구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된 이 시대가 내게 여전히 의문들을 남긴다는 사실이 나를 증명한다. 의문이라는 고통, 두려움으로 빚어진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나는 짐승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고 나는 우리 엄마 아빠의 귀한 아들이다. 나의 귀함이 고작 ‘아들’이라는 ‘성’에 근거한다면, 나는 그 귀함을 기꺼이 벗고 허기진 짐승처럼 이 도시를 어슬렁거려야 하겠지. 아마도 ‘개새끼’로 사는 일을 피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다. ‘개새끼’가 아니려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삶인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 아들이어서 귀한 게 아니다. 딸이라고 비천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아들딸들이, 모든 부모의 자식들이 다 귀하고 존엄하다. 누가 아니겠는가.
나는 페미니스트다. 하하. 그러거나 말거나, 뭐라고 주장하든, 뭐라고 불리든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이 글은 성가시게 유행하는 가상세계에서의 그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유행을 빌어 하는 ‘인간’과 ‘관계’와 ‘세상’에 대한 나의 이야기이다. ‘인간’을 탐구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연기’를 업으로 삼은 한 배우가 글로 전하는 ‘인상’이다. 쉽게 닿지 않겠지만 내 식으로 하겠다.
‘차이’는 ‘차별’의 장벽이 되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는 ‘차별’ 없이 모든 다른 존재들과 이 위대한 기술을 통해 연결되고 싶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 안에서 진정한 ‘관계’를 갖고 싶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배우’의 역할을 이 질서 안에서 삭제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불가능한 이상과 같지만 나는 그래서 ‘배우’로 존재하고 이곳에서 ‘나’로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 다른 유형의 인간들이 전쟁, 종교, 지배의 역사 속에서 가져온 생물학적 기능과 사회적 역할의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 냈다. 차이를 차별로 전환하는 강자의 폭력은 성의 차이뿐 아니라 모든 개개인이 구성하는 사회 안에서 소수자를, 약자를 향한다.
모든 아들딸들;인류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고통이 아니라 편의와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로 우리는 교류가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시대의 전쟁은 더 이상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시대에는 구시대의 교리, 질서가 아닌 이 시대의 정신과 사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전쟁’을 멈추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돈의 거래’와 ’경쟁을 통한 성장’이 낳은 기술이 인간성을 삭제하는 참상을 우리가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과 우리의 감정은 현실과 가상이 다차원적으로 교차하는 혼란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타인과 나 사이를 연결하는 <소셜 미디어>와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소셜 네트워크>는 첨단 기술의 비약적 성장과 함께 <가상 세계>를 펼쳐내며 <현실 세계>와 다차원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이는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각종 최신 디바이스를 사용하는 현대인의 삶을 반영하며 인간 사회와 인간상 그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우리는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간다. 현실과 가상이 혼재된 완전히 새로운 ‘신세계’다. 난해한 용어 따위를 다 지워버리고도 여러분은 지금 이 세계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여기는 ‘facebook’이고, 당신은 거기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이라는 두 개의 세계에 동시에 속해있다. 타인과 빛의 속도로 연결되는 관계망은 인류 문명의 위대한 성취다. 이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전쟁’하지 말고 ‘품앗이’하며 평화를 찾아야 한다.
전쟁은 두려움의 상징이다. 비로소 우리를 하나로 연결한 기술의 세계에 매몰되어 모든 개인과 개인이 서열다툼 하듯 경쟁으로 전쟁을 치른다. 어떠한 승자도 행복하지 않은 전쟁. 그것은 ‘최면’이다. 어떠한 승자도 영원하지 않은 이 시대. 대한민국 전 대통령도, 초대기업 재벌 3세도 구치소에서의 시간을 태우고 있는 이 시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타인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질서도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인간성을, 우리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 빚어낸 현재가 우리를 잠식하지 않고 우리를 연료나 부품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우리 스스로 더 잘 살 수 있게 할 수 있도록 각성해야 한다.
나는 나다. 당신이 당신인 것 처럼. 하하. 그러거나 말거나, 뭐라고 주장하든, 뭐라고 불리든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이겨내기 위해 힘쓰고 싶지 않다. 당신과 연결되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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