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 김혜순 「첫」 中
영화 ‘파리의 한국남자’는 사라진 아내를 찾으려는 남편이 다시 두 사람의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고난의 여정을 담았다. 남자와 여자는 끝내 만날 수 없다. ‘처음’과 ‘끝’이 맞닿아있으나 만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남자와 여자는 내내 뫼비우스 띠를 생각하게 한다.
상호(조재현)의 눈에는 공허함만이 존재한다. 낯선 프랑스 파리에서 아내 연화(팽지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연화를 찾아 헤매는 2년여동안 상호에게 파리는 더 이상 낭만적이거나 이국적이지 않으며, 발 딛는 곳마다 괴로운 곳이 되었다.
떠돌아다니는 곳마다 잔상이 남아 속절없이 피폐해지기만 하는 상호는 연화가 떠난 사실이 자의적이지 않다는, 집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존재는 부재가 되어야 자신을 각인시킨다.
관객은 상호가 찰나에 떠올리는 플래시백으로 사라지기 전 연화의 감정을 짐작하고, 그들의 행복했던 시절을 공감한다. 러닝타임 내내 조재현은 아내를 잃은 남편 그 자체가 되어 맨 얼굴로 상실을 마주한다. 상호의 원초적이고 거친 모습들은 연민을 자아내게 한다.
아내 찾기라는 목표가 정해진 상호는 ‘끝’을 향해 달린다. 하지만 “살아있는 파리를 보고 싶다”고 말했던 연화는 과거 ‘처음’을 동경한다. 그녀는 거리의 매춘부들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영화관에서 동성애자들이 성을 사고, 파는 것을 목격하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연화가 떠난 것인지, 떠나야만 했던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호가 할 수 있는 일은 ‘끝’에서 다시 ‘처음’을 향해 가는 것뿐이다.
상호는 아내를 잃어버린 것이 처음이기에 왔던 길을 되짚어간다. 아내를 찾으면서 처음으로 노숙자 생활을 했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동성애자에게 처음 성을 팔기도 했다. 연화와 상호는 서로 닿지 않는 ‘처음’과 ‘끝’이다. 처음이 있다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나는 지점 없이 반복된다. 역설적이다.
‘파리의 한국남자’는 전수일 감독이 프랑스 유학 시절 들었던 소문을 상상해 재구성했다. 아내를 잃어버린 남편이 1년여의 노력 끝에 찾아냈으나 몽롱하게 약에 취해있었더라는 이야기다.
전 감독은 ‘찾아냈다’는 결말을 원하진 않아 보인다. 자의든 타의든 1년전 아내의 ‘처음’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대사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장면도 추측만으로 이해시키려는 인상이 강하다. 이러한 의도는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떠넘겨 즐거
관객들은 ‘파리의 한국남자’를 통해 ‘끝’에서 ‘처음’으로 가는 상호처럼, 혹은 ‘처음’의 언저리에만 맴도는 연화처럼, 혹은 그들을 지켜보는 구름 한 조각이 되거나 파리 속을 방랑하는 이방인이 되어 두 사람을 바라볼 수도 있겠다. 86분. 청소년 관람불가. 28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