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박정선 기자] 27세에 요절한 커트 코베인을 떠올리며 “인생이 생각보다 짧을 수도 있다”면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스물’의 치호(김우빈 분), 동우(이준호 분), 경재(강하늘 분)다. 하지만 이내 술잔을 기울이며 섹스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어딘지 익숙한 이들의 대화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청춘들에게 무언가를 제시하지 않는다.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도 여자 이야기로 키득거리는 세 아이들을 통해 보여지는 ‘스물’ 속의 스무 살은 그저 누구나가 겪었을 법한 이야기로 관객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누군가에게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위로 같은, 또 누군가에게는 지나온 시간을 추억하는 일기장 같은 영화다.
이병헌 감독이 ‘스물’이라는 작품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무려 10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당초 20대 전반을 아우르는 버킷리스트를 써보려던 그는 ‘스물’에 포커스를 맞추고 수정작업에 들어갔다. 어설프면서도 귀여운 스무 살이라는 나이를 그린 결과 시사회 당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현재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실시간 예매율에서도 40%에 육박하는 성적을 내고 있다.
“녀석들의 인기란. 하하. 저도 놀랐어요. 건방을 떨고 싶긴 한데 배우들의 몫이 큰 걸 알고 있으니까요. 일반팬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관에 들어가니 교주 같기도 하더라고요.(웃음) 우려했던 것보다는 반응이 괜찮은 것 같아요. 제 유머 스타일이 호불호가 갈리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대중적이지는 않잖아요.(웃음) 물론 나의 스타일에 변화를 주진 않았지만 의식을 안 할 수는 없었어요.”
이 감독의 ‘말맛’은 이미 충무로에 정평이 나 있다. 영화 ‘과속스캔들’ ‘써니’ ‘타짜-신의 손’ 등의 각색을 맡았으며, 직접 메가폰을 잡은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2012)로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을 받으며 연출 능력도 인정받은 바 있다. ‘스물’은 그런 이 감독의 첫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마음먹고 했어요. 설레는 마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시사회 당시 관객들의 목소리, 숨소리 하나까지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요.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죠. 그러면서 제 작품에 허점이 보이기도 했어요. 감정 리듬이 흐트러지는 부분도 조금 보이는 것 같고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극찬을 쏟아내도 이 감독이 자신이 작품을 보는 시선은 오히려 냉철했다. 겸손한 태도가 어색할 정도로 ‘스물’ 속에는 이 감독만의 매력이 잔뜩 묻어났다. ‘힘내세요, 병헌씨’는 물론이고 앞서 언급한 ‘써니’ ‘과속스캔들’ 등에서 진가를 발휘했던 이 감독의 ‘말맛’은 ‘스물’에서 더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투자자들에 의해 영화의 콘셉트가 바뀌는 등 신인 감독이 겪을 법한 고충을 비켜갈 수 있었고, 관람가 등급도 15세 이상으로 결정된 덕분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됐다.
“신인감독 치고 제 색깔이 많이 묻어난 영화 같아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죠. 시나리오 단계부터 작정했던 것도 있었고요. 제가 언제 또 이런 작품을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했어요. 만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얼추 비슷한 그 어디쯤은 되는 것 같아요.(웃음)”
관객들을 사로잡은 데에는 이 감독 특유의 ‘말맛’도 있지만 인공의 청춘 스토리를 강요하지 않은 현실적인 이야기도 한몫했다. ‘힘든 청춘을 견디고 이렇게 성공했어요’같은 진부한 스토리는 일찌감치 벗어내고 스무 살을 보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한 그런 과정을 그려냈다.
“결과물을 내놓고 ‘이루었어요’를 보여주려던 게 아니에요. 20살이라는 지점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그런 시간이 있다는 걸 담아낸 거예요. 이들이 뭘 얻고 가야한다는 걸 애초에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느낄, 혹은 과거에 느꼈던 감정을 그리고 싶었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친근한 에피소드를 선택하게 된 겁니다. 그래도 영화적으로 꾸미긴 했어요. 진짜 현실로만 간다면 세 친구들이 더 까졌어야죠, 하하.”
이야기가 더욱 현실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극에 녹여냈기 때문이다. 치기어린 20대를 지나온 자신의 이야기는 물론,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작업은 다른 시나리오 작업보다 훨씬 수월했다.
“제 친구 중에 경재와 동우가 있었어요. 친구한테서 가지고 오는 정서가 보편적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사실 실존 인물 그대로 하면 재미는 없죠. 실제 경재는 명문대 입학해서 대기업 가는 게 꿈이었던 친구인데 지금은 육군 소령이고, 동우는 진로에 있어서 방황을 하다가 큰아버지 공장을 물려받게 됐어요. 친구들이 보면 뭐라고 할 것 같냐고요? 아마 ‘병신새끼’라고 하겠죠. 하하.”
배우들은 이 감독을 믿고 철저히 망가졌다. 무려 김우빈, 이준호, 강하늘이라는 ‘대세’ 청춘들을 모아놓은 것도 놀라운데 이들을 가감없이 망가뜨리는 모습은 더욱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신인 감독의 패기인가?
“나름 아이돌이고 일본에서 왕자소리 듣는 친구인데 왜 걱정이 안 됐겠어요. 준호 같은 경우는 ‘정말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하더라고요. 애써 모른 척 했죠.(웃음) 후줄근하게 만들어놓으려고 노력했어요. 그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멋있음’이 조금이라도 피어나지 않도록 싹을 밟아버렸어요.(웃음)”
시나리오 단계부터 생각했던 배우들이 모두 그의 시나리오에 관심을 보였고, 캐스팅에 성공한 이 감독에게 ‘스물’은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충무로의 유망주로 떠오른 그에게 ‘스물’의 평가가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유망주’에서 ‘실력파’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이 감독은 “친구와 수다를 떨고 나온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드러냈다. 또 그는 앞으로 만들어나갈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대면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시사회와 홍보 영상을 통해 김우빈, 준호, 강하늘보다 더한 외모 자신감을 내비쳤던 이 감독. 그의 진심을 들어봤다.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세울 외모는 아니죠. 외모는 어느 곳에 가나 나보다 괜찮은 사람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인기는 내가 더 많아요. 하하.”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