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tvN 드라마 ‘미생’이 막을 내렸다. 배우들은 세부로 포상 휴가를 떠났다. 한국에 남은 강소라(24)는 몸살을 앓으며 ‘안영이’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24일 서울 이태원동의 한 식당에서 강소라를 만났다. 그는 “이런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정말 좋아서 감정이 북받친다”며 “드라마가 끝나니까 진짜 회사에서 퇴직한 것처럼 아쉽다”고 울었다.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도 그는 10여분 더 눈물을 훔쳤다.
“종방연 때는 눈물을 글썽이기만 했는데···. 에이 씨! ‘님아 그 강을’ 같은 영화를 봐도 안 우는데 작품을 할수록 눈물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솔직히 처음에는 이렇게 좋아해줄지 몰랐거든요. 신입사원 역할이라 지금 제 나이가 아니면 못 한다는 생각에 도전했는데 훌륭한 작품에 묻어가네요. ‘미생’이 워낙 좋은 드라마잖아요.”
강소라는 영화 ‘써니’, 드라마 ‘못난이 주의보’ ‘닥터 이방인’을 통해 당찬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자신은 만족하지 못했었나 보다. 욕심이 과했기에 만족감은 낮았다. ‘미생’은 달랐다. 그는 “욕심내지 않고 연기한 건 ‘미생’이 처음”이라고 했다.
“어떻게 캐릭터를 풀어야할까 보다 어떻게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어요. 질적으로 향상된, 배우로서 즐거운 고민에 빠진 거죠. 대본에 모든 게 잘 표현돼 있었던 덕분이에요. ‘안영이’라는 역할에 대해 바로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꼭 하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해요.”
‘미생’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사며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그 중에서도 직장인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현실감 있게 그려진 극 중 모습들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콕 찔렀다. 실제 기업을 체험하면서 캐릭터에 생동감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강소라도 예외는 아니다. 극 중 강소라는 자원팀 신입사원 안영이 역으로 분했다. 안영이는 명문대 출신으로 훌륭한 업무 능력을 가진 신입사원이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사회생활도 연예계에서 시작했다. 직장 체험이 나의 막연함을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안영이 같은 사원이 있더라고요. 플랜트팀 직원이었는데 그 분을 많이 참고했어요. 일단 미팅이 워낙 많으니까 하이힐이나 불편한 복장은 안 돼요. 단지 책상 밑에 항상 구비해놓을 뿐이더라고요. 눈이 피로하니까 안경도 있고요. 반면 다른 분들 책상에는 귀여운 캐릭터 물병, 가습기 등등 다양한 물건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분들 책상에 비해서 영이의 책상은 단출하게 구상했죠. 최대한 사랑스럽지 않은 모습으로요.”
“여성으로서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 풀리지 않은 숙제인 것 같아요. 하지만 성별에 따라 경중이 있는 건 아닐 거예요. 남성들도 일하면서 버티는 것 자체가 힘들지 않을까요? 엄마로서 힘든 것만큼 아빠로서의 역경도 많을 테죠. 이 작품 덕분에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어요. 왜 술을 마시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지, 하필 꼭 치킨을 사오는지요. 밤늦게 들어와 덥수룩한 수염을 왜 들이미는지도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남녀의 역할에는 차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또 “얼마나 짐이 많은가 보다 어떻게 그 짐을 지우느냐가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연예인으로서 알지 못했던 직장인들의 고충을 알게 된 것. “배우는 작품의 기획단계를 잘 모른다. 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시나리오를 읽고, 촬영에 합류해 연기만 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막연하게 직장인들은 안정적일 거라 생각했죠. 몇 년이 지나면 승진하고, 월급도 오르고,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고요. 연예인은 불안정하잖아요. 그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라고요. 훨씬 더 일이 치열하고, 회사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요. 특히 상사에서는 감정의 공유가 어렵더라고요. 사장까지 거치는 결재부터 시작해서, 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들까지 말이죠.”
그래서 더욱 유심히 관찰했던 부분이 인간관계다. 강소라는 “신입이 대리나 과장에게 말할 땐 어떻게 다른지, 의자를 돌리는지 직접 걸어가는지, 고개를 돌리는지 등 모든 행동 사항을 체크했다”며 “결론적으로 신입사원은 직접 걸어가야 한다”며 웃었다.
‘안영이’는 좋은 능력을 가졌지만 대인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인물이다. 고집이 세고 똑 부러진 성격이 자원팀 합류 이후 상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이유가 됐다. 마부장(손종학)에게 수시로 성희롱도 당했다. 그러면서도 묵묵히 견디며 결국 상사들의 인정을 받았지만, 강소라는 답답했다.
“만약 실제로 하대리(전석호) 같은 상사를 만났다면 더 털털하게 다가갔을 거예요. 별다른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하면 어떤 게 불만인지, 뭘 고칠지 물어봤겠죠. 영상으로는 답답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아무튼 안영이는 남자 동료처럼 인정받은 것 같아요. 또 여자로 무시당하는 건 아버지에게도 당했기 때문에 마부장의 성희롱에도 의연히 대처한 것 같고요.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 무시를 받는다고 생각했던 거죠.”
실제 종합상사에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4~5년 전 자료를 모두 꺼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고. 야근은 기본이고 함께 밤을 새는 경우도 많다. 여자사원을 기피하는 이유다. 안영이도 ‘여자’라서 인정받지 못해 안타까움을 샀다.
강소라는 “영이가 계단에서 우는 장면이 가장 안쓰러웠다. 오죽 털어놓을 데가 없었으면 혼자 그런 곳에서 울었겠나”라며 “다큐멘터리를 봐도 너무 많이 지친 사람은 오히려 자기 이야기를 남 얘기처럼 담담하게 한다. 영이가 끝내 장백기(강하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에도 울지 않았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남녀가 있으니 이성간 호감이 없을 수는 없겠죠? 초반에 장그래(임시완)에게 말을 많이 걸었던 건 인턴이나 낙하산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는 모습이 불쌍해서였어요. 그러다 의외의 능력을 알게 되니까 정이 느껴지더라고요. 장그래가 영업3팀에 녹아들고 나서는 영이의 조언도 필요 없어졌잖아요. 장백기의 경우 ‘동병상련’이에요. 신입이면서 상사와의 관계가 안 좋으니까요. 또 장그래를 향한 장백기의 열등감도 알고 있었고요. 누구보다도 비슷한 길을 밟아온 친구이기에 동질감을 느꼈죠.”
그러나 ‘안영이’를 보는 시청자들의 눈은 까다로웠다. 원작 웹툰의 ‘안영이’와 싱크로율(닮은 정도)이 낮다는 것. 윤태호 작가도 한 인터뷰에서 안영이가 원작 캐릭터과 다르다고 밝힌 바 있다. 연기가 어려웠을 법하다.
그는 “안영이 자체가 만화에 드러난 부분이 적다. 또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부족한 부분이 거의 없다”며 “그래서 인간관계에 서툴고,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며 받는 것도 거부하는 성격으로 분석했다”고 말했다.
“영이는 처음에 짧은 머리였어요. 아들을 원했던 아빠의 사랑을 얻기 위한 장치죠. 부녀 관계가 끝난 뒤 삼정물산에서 일할 때에는 단발머리였어요. 아빠에게서 조금은 벗어났지만 여성성의 상실은 극복하지 못했다는 상징이에요. 그 후 아빠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어 긴머리로 변신했어요. 예를 들어 부모님에게서 빚 독촉 전화가 왔을 때에도 상사한테 술 한 잔 하자고 할 수도 있는데, 혼자 괜찮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내면의 상처를 안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시즌2에서는 안영이가 더 성질을 부렸으면 좋겠어요. 인간적으로 친숙한 모습도 많이 보여주고요. 또 영이가 하대리 입장이 됐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도 궁금하네요. 자기보다 더 독한 사람을 신입으로 만났을 때, 영이의 반응은 어떨까요? ‘멘붕’일 수도 있겠죠. 하하. 장그래와는 더 돈독해질 것 같기도 해요. 회사를 나간 전 직장동료와는 사적인 얘기를 많이 나눌 수 있을 거예요. 바둑을 했다는 말도 직접 들었으면 좋겠네요.”
웹툰 ‘미생’은 2012년 1월부터 2013년 10월까지 연재됐다. 완결까지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시즌2도 마찬가지일 터. 강소라 입장에서는 드라마 시즌2
“아직 내년 계획은 없어요. 만약 다음 작품을 한다면 표현력이 좋은, 주변사람들과 관계가 부드럽고 활기찬 인물을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모두 극 중 부모님과 관계가 안 좋았거든요. 실제로 저는 되게 인간적이고 긍정적이고 밝아요. ‘인간 강소라’가 돋보일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