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세상이 어수선해질수록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서 관심을 끊게 된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사람이 쓰러지거나 강도를 당해도 모른 척 하기 일쑤다. 도와줘봤자 번거롭기만 하고 고맙다는 소리를 못 들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도 사정은 비슷했다. 성 밖 길거리에 시신이 버려져있는데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아서 나중에 알게 된 경우가 있었는데 행인들이 모른 척 한 이유는 간단했다. 신고하면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귀찮아지거나 재수가 없으면 용의자로 찍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눈뜨고 못 보는 의협심에 불타는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추재기이(秋齋紀異)에는 서강 사람인 김오흥을 대표적인 협객으로 꼽았다.
오늘날에는 그냥 한강이라고 부르지만 조선시대에는 경강이라고 불렀다. 배로 운반된 세곡들을 비롯한 각종 물자들이 이곳을 통해서 한양으로 유입되었다. 조선후기 접어들면서 한양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경강을 통한 물자의 유입도 크게 늘어났다. 경강 중에서도 포구들이 있고 물자가 하역되는 곳을 오강이라고 불렀는데 용산과 마포, 서강, 양화진, 그리고 한강진이었다. 그 밖에 노량진이나 서빙고, 송파등도 배들이 제법 드나들었다. 이에 발맞춰서 강변에는 포구들이 늘어나고 물건을 사들이는 객주, 그리고 들어온 물건들을 중개해주는 거간꾼과 중간도매상격인 중도아들이 드나들었다. 배를 몰거나 부려진 짐을 나르는 일꾼들도 모여들었는데 각지에서 올라온 유랑민들이 그 역할을 떠맡았다. 고향을 떠난 가난한 이들이 모여든 강변은 슬럼화가 되어버렸다. 타 지역 사람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을 강대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천시했다. 무식하고 무례하다는 선입견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김오흥만큼은 달랐다.
그는 오늘날 서강대교 북단에 위치한 서강에서 배를 모는 사람이었다. 뱃사람을 천시하는 조선시대 관습으로는 제일 밑바닥 인생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완력이 세고 배짱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그에 걸 맞는 일화가 전해져온다. 바로 훈련도감 별영창에 딸린 읍청루라는 정자의 처마에 거꾸로 매달려서 기와 골에 발을 걸고 나아갔다는 것이다. 발끝으로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움직이려면 적지 않는 완력이 필요하고 떨어지면 끝장이라는 압박감을 견디는 배짱도 있어야만 했다. 힘만 좋은 게 아니라 민첩하기도 했는데 제비나 참새에 비유한 것을 보면 제법 날쌘 모양이었다. 이종격투기의 최강자라고 불리는 효도르의 파워에 인간탄환이라고 불리는 우사인 볼트의 민첩함을 갖췄다고 하면 과장일까? 어쨌든 마음만 먹었으면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서 먹고 살수도 있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김오흥은 강대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면 나서서 뜯어말리는 역할을 했는데 주로 힘없고 약한 사람 편을 들었다. 그러다 일이 커지면 힘을 쓴 모양인데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도 제법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굽히지 않았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김오흥의 활약 덕분에 강대, 특히 서강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함부로 행패를 부리거나 나쁜 짓을 하지 못했다. 얼마든지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를 자처한 것이다. 무뢰배와 왈자와는 다른 협객이나 의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에게는 정의의 사도이자 스타로 비춰졌으리라.
정명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