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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고우영 만화 ‘일지매’ |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이 넘쳐나면서 울분과 한이 쌓여나갔다. 검계와 살주계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대신 풀어준 것이 바로 의적이라고 불린 일지매였다. 부패한 관리와 악독한 부자들의 재물을 털고 매화 가지를 남겨놔서 자신이 왔다갔다는 것을 남겨놓았기 때문이 이런 별명이 붙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실존인물이었는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어느 시대에 활약했고,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아마 조선시대 이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도 ‘내가 옛날에 들었던 얘긴데 말이야. 일지매라는 의적이 있었데.’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중국 명나라 때 도둑질한 현장에 매화 가지를 남겨놓은 일지매라는 도둑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들어온 소설 속의 가공인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오랜 세월 구전되어온 이야기들이 가공의 인물인 일지매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일지매가 실존했다는 증거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조수삼이 쓴 추재기이에는 일지매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첫 머리가 바로 일지매는 다른 도둑들과는 달리 의협심이 있는 협객이라는 것으로 봐서는 지배층인 양반에게도 아주 깊은 인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추재기이를 좀 더 살펴보면 일지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탐관오리의 재물을 훔쳐서 가난해서 처자를 돌보지 못하거나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처마를 건너뛰고 벽을 타는 솜씨가 귀신같았다. 그래서 도둑을 맞은 집에서도 그가 왔다갔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늘 물건을 훔친 자리에 자신의 별명인 일지매를 상징하는 붉은 매화 가지를 남겨 놨다. 자신의 소행이니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조수삼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홍길주라는 학자도 자신의 책에 일지매에 관한 이야기를 남겨 놨다. 여기서 그는 일지매가 숙종 때나 효종 때 활동했던 인물이라고 얘기한다. 효종 때 이완을 농락한 묵매도(墨梅盜)라는 도적에 관한 기록도 볼 수 있다. 묵매도는 임금이 이완 장군에게 자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을 알고 일부러 붙잡힌 후에 몰래 감옥을 나와서 도적질을 했다. 그러자 그가 도둑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완이 풀어줬다는 내용이다.
이완같이 이름난 장수를 마음껏 농락했다는 사실은 민중들에게는 두고두고 통쾌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일지매가 매화 가지를 남겨놓거나 매화가 그려진 종이를 놓고 갔다면 묵매도는 먹으로 매화를 그리고 갔다는 점만 달랐다. 따라서 동일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물론 다른 도둑들이 그의 이름을 사칭하거나 써 먹었을 수 도 있다. 아니면 사람들이 부자 집을 터는 도둑들을 보고 소설 속에 등장했던 일지매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당대 사람들이 일지매같이 못된 부자나 권력자들을 혼내주는 의적을 갈망했다는 점이다. 이런 희망들은 일지매에 관한 전설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으며 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사실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그를 조선의 길거리 스타 반열에 올려놓을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서는 분명 스타나 다름없는 존재나 다름없으니 다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서 현대가 되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의적에 열광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대신 없애주거나 폭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외치는 탈옥범들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명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