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투데이 진현철 기자]
영화 ’한공주’에서 은희(정인선)는 전학 온 공주(천우희)를 집에 초대해 이런 대화를 나눈다. 예의 고등학생들이 이성에 대한 궁금증과 친구를 향한 애정이 드러날 법한 대화다.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있는 이들에게 "키스해봤어?"라는 이야기는 아련하고 달콤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공주에게 그 이야기는 꺼내기도 싫은 ’악몽’이었을 거다. 다행히 은희가 공주의 볼에 뽀뽀하며 "내가 44번째"라고 여고생다운 풋풋함을 풍겨 관객의 기분을 한층 밝게 만든다.
’한공주’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청소년 집단성폭력이라는 소재와 내용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노력이 앞서 언급한 공주와 은희의 대화는 물론,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에게 궁금증을 던진다. 고등학생 공주는 무언가 잘못한 것처럼 보인다. 주위 선생님들과 학부모, 친구들로부터 쫓기듯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다. 관객이 ’도대체 왜?’라는 물음을 쏟아낼 만하다.
공주 역시 마찬가지다.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도망쳐야 하죠?"라는 공주의 말에 온전하지 않은 사회의 모습이 담겨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처럼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극 후반부 가해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공주를 찾아와 난리를 치는 장면에도 담긴다. 새로운 학교에서는 조용히, 조심스럽게 다니라는 이전 학교 선생의 말을 통해서도 관객은 답답함을 느낄 만하다.
공주는 다가오는 같은 반 친구 은희와 다른 동급생들을 밀어낸다. 누군가 휴대폰 카메라로 자신의 사진이나 노래하는 동영상을 찍으면 기겁을 한다.
이유는 있었다. 다시 한 번 도대체 공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질 때쯤, 영화는 공주에게 벌어진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공주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소품과 상황, 대사들이 단서였다.
새로운 학교에 다니기 위해 얹혀살게 된 집의 고장 난 선풍기와 기를 쓰고 수영을 배우려는 공주의 모습, 43명의 고릴라와 키스했다는 말, 이전 학교에서 단짝 친구인 화옥이와의 장면 등은 소녀의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시켜 보여준다. 관객의 마음을 안타깝게, 답답하게 만드는 장치들이다.
이수진 감독은 이런 한공주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섬세한 감정이 담기도록 접근했다. 성별이 중요하진 않지만 남자인 감독은 여자보다 더 부드럽고, 섬세한 연출력을 뽐낸다. 흥행 여부를 떠나 데뷔작이지만 성공적이다. 이수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
한공주를 연기한 천우희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복잡하고 답답하며 힘들었을 연기를 제대로 소화했다. 영화 ’써니’에서 ’본드녀’를 통해 이미 연기력을 입증한 천우희이긴 하지만, ’한공주’에서 제대로 자신의 잠재력을 터트려 버린다.
한공주의 어깨 위로 짓눌린 아픔과 슬픔. 열몇 살 소녀에게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거대한 폭풍 속에서 힘겹게 적응하는 모습이 28살의 천우희로부터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관객은 112분간 공주의 감정에 울고 답답해하고, 안타까운 생각을 할 것으로 보인다.
누가 봐도 공주는 피해자인데 다른 이들은 공주가 가해자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나. 이 감독은 그런 사회 현실도 꼬집었다. 공주는 낮게 읊조리듯 또 한 번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도망쳐야 하죠?"라고 말한다. 화를 내며 오열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담담한 듯한 공주의 말은 더 안타깝게 들린다.
영화는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소재 탓이겠지만 안타까운 결과다. 성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일부 청소년들이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는 내용이 담긴 작품이다.
제13회 마라케시 국제영화제와 제43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각각 대상격인 금별상과 타이거상을 받는 등 수상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프랑스 출신 배우 마리옹 꼬띠아르는 "여주인공(천우희)의 연기가 너무 놀랍고 훌륭하다"고 극찬했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내 나이에도 배울 점이 아직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호평하기도 했다. 112분. 17일 개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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