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조영남(75)의 그림 대작(代作) 사건을 둘러싼 상고심 공개변론이 진행됐다. 1, 2심을 거치며 유·무죄가 뒤집힌 이번 사건은 최상급심인 대법원에서도 팽팽한 대립 속 뜨거운 공방으로 펼쳐졌다.
28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대법정에서 사기 혐의로 기소된 조영남의 상고심 사건 공개 변론이 진행됐다.
조영남은 지난 2009년부터 2016년까지 무명화가 송모씨에게 총 200~300점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배경에 경미한 덧칠을 한 뒤 자신의 이름으로 고가에 판매, 1억6000여만 원을 편취한 혐의로 2016년 기소됐다.
조영남은 1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했고, 2심 재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 받으며 사기 혐의를 벗었다. 하지만 검찰이 불복해 상고하면서 3심까지 이어졌다.
이날 유튜브로 생중계 된 공개변론에서는 조영남이 자신의 그림이 대작(代作)인 것을 알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판매한 것이 사기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두고 각계 전문가가 참고인으로 출석, 의견을 진술했다. 검찰 측 참고인으로 중견 화가인 신제남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자문위원장이, 조영남 측 참고인으로는 표미선 전 한국화랑협회 회장이 참석했다.
신제남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자문위원장은 "예술행위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화가가 조수를 사용한다는 관행은 없다. 오로지 혼자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창작자의 의무이자 상식"이라고 말했다.
신 자문위원장은 "다만 작가의 키보다도 큰 대형작품 작업을 할 경우, 장르 불문 조수를 쓸 수는 있다. 이 경우 조수는 같은 공간에서 원작자와 감독 지시를 받고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조수의 이름이 밝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신 자문위원장은 "송 작가는 미술전공 프로작가다. 아마추어 작가가 프로작가를 조수로 사용했다는 사실에 우리 작가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면서 "가수가 본업인 사람이 세계적인 작가처럼, 대가인 것처럼 합리화 시킨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조영남은 조수가 완성한 작품을 자신이 그린 작품이라고 쇼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반면 표미선 회장은 조영남의 작법이 37년간 업계에 몸 담아 온 자신이 본 업계 관행이라는 의견을 냈다. 표 회장은 "조수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다수 화가들의 작업 방식이며 해외에서도 흔한 사례"이라고 밝혔다.
이어 "조수의 도움을 받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구매자에게 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구매자가 직접 물어볼 경우 답해주기는 하지만 물어보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또 표 회장은 검찰 측이 대작화가와 조영남 매니저가 주고받은 SNS 대화 메시지를 보여주며 해당 그림이 조영남의 작품인지, 대작화가가 그린 작품인지에 대해 묻자 "조영남이 추구하는 터치와 견해가 담긴 만큼 조영남의 작품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검찰 측은 최후변론에서 "결국 쟁점은 남이 그린 그림을 자신이 그린 것처럼 판매한 것이 합법이냐 적법이냐"라며 "쉽게 명성을 얻은 만큼 더욱 책임있게 작업했어야 했으나 실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대작화가를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고 부를 얻었고, 대작화가에게 깊은 상처를 줬다"고 말했다.
이어 "이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면죄부를 준다면 또 다른 연예인, 정치인, 재력가, 고위 공직자 출신 유명인사 등 유명인들이 자신의 부와 명성을 인정해 이와 같은 고수익을 올리는 폐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며 "이 사건은 피해자의 권리 구제뿐 아니라 한국 미술계 질서에 영향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므로 신중한 판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변호인 측은 최후변론에서 "이 사건에서 검찰 주장은 피고인이 화투 그림을 모두 그린 게 아니라 조수의 도움을 받아서 그린 그림임을 고지할 의무가 있는데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은 부작위에 의한 기망행위고, 구매자들은 기망행위에 속아 피고인이 전부 그렸다는 착각 속에서 구매했으니 사기라는 것"이라며 "과연 구매자들이 착각해 구매했는지와, 작가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무시하고 고지의무를 인정해야 하는지가 쟁점"이라고 말했다.
변호인 측은 "회화의 전통적인 개념을 무시한다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현대미술에서는 원칙적으로 조수 존재 여부를 고지한다는 의무는 타당하지 않고, 질문 받는다거나 할 때 고지의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면서 "이 사건은 화투 그림이 전통적 회화라 보기 어려운 점이나 구매자들이 소재 독창성 피고인 철학에 동의 공감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갤러리를 통해 구매했거나 지인 추천으로 구매했다는 것, 피고인이 주변인들에게 조수와 같이 작업하는 점을 알렸다는 점으로, 고지의무 위반했다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은 "법률적으로 화가에게 고지의무가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주장이라 생각한다. 검사 측 주장대로라면 피고인뿐 아니라 갤러리 관계자뿐 아니라 화투그림 추천한 사람들도 모두 고지의무 위반 이유로 사기죄 공범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검사 논리대로라면 피고인의 화투 일부를 그린 피고인의 조수들은 당연히 사기죄 공범으로 수사 받아야 하는데 입건조차 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이 유죄 될 경우 국내 유명 작가는 물론 해외 유명 작가들도 국내에서만 사기죄가 성립된다. 국제사회에서 우리 미술계만 고립될 수 있다"며 국내외 예술 관행을 고려한 판결을 내려줄 것을 당부했다.
검사, 변호인 측 최후변론에 이어 최후진술대에 선 조영남은 시종 떨리는 목소리로 결백을 주장했다. 조영남은 "지난 5년간 이런 소란 일으킨 것 죄송하다. 평생 가수생활 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다녔던 용문고 때 미술부장 지냈을만큼 미술을 좋아했고, 미술을 좋아하는 만큼 50년 넘게 그림 특히 현대미술을 독학으로 연구한 끝에 광주예술비엔날레, 예술의전당 초대전, 성곡미술관 등에서 40여 차례 미술전시회를 하면서 화투를 그리는 화가로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화투 그림 그리게 된 것은, 앤디 워홀이 평범한 코카콜라병을 그려 화제 된 것에서 착안해, 그것을 팝아트로 옮겨낸 것"이라며 "화투를 그리며 조수도 기용하게 됐고 조수와 함께 작업하는 모습을 틈틈이 방송 통해 보여줬다. 내 작업 방식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영남은 "나는 현대미술을 공부하면서 특이한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음악과 미술이 똑같은 예술임이 분명한데 그것의 실현 방법에서는 음악과 미술이 정반대로 구사된다는 것"이라며 "음악에서는 적어도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식의 음악에서는 반드시 엄격한 형식과 규칙이 요구된다. 음정 박자는 매우 정교한 수학적 수치로 구분되어 있고, 기악 역시 각자 악기의 방법대로 연주되어야 올바른 음악으로 성립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에 반해 미술은 아무런 규칙도 방법도 없다. 자유로운 창의 방법이기 때문"이라며 "20세기 이후 현대미술 문법은 완전히 해체됐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주문 방식도 관계 없다. 반 고흐도 피카소도 그림은 어떻게 그리라고 한 적이 없다. 붓으로 그려도, 물감을 뿌려도 훌륭한 작품이 된다"고 말했다.
조영남은 "내 화투 그림은 화투를 어떻게 그렸느냐보다 그림마다 딸린 제목에 주목해줄 필요가 있다. 기소된 그림들 모두 한국인의 온갖 애환이 깃든 화투를 아름다운 꽃으로 상징해 그렸다. 그 꽃이 극동지방, 대한민국에서 왔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각 화투마다 이름을 표현했다"면서 "이렇듯 내 미술은 개념미술에 가깝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리느냐 못 그리느냐로 논란 벌이는 것은 옛날 미술개념으로 느껴질 뿐이다"고 말했다.
조영남은 "남은 인생을 갈고 다듬어 사회에 보탬 되는 참된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살펴주시기를 청한다"면서도 "옛날부터 어르신들이 화투 가지고 놀면 패가망신한다고 했
대법원은 추후 판결 선고일을 공지할 예정이다. 통상 공개 변론 뒤 한 달 내 판결 선고가 이뤄진다.
과연 조영남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에 이어 대법원이 최종 어떤 판결을 내릴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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