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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 1세대 스타 최은희가 우리의 곁을 떠난다. 향년 92세.
고(故) 최은희의 발인식이 오늘(19일) 오전 9시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다. 유족들을 비롯해 생전 고인과 각별한 애정을 나눴던 소중한 이들이 마지막 길을 함께한다.
이혼·납치·탈출·망명·투병 등 그야말로 영화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고인은 2010년대 초반부터 신장 질환 등을 앓으며 오랜 기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건강을 되찾지 못했다. 결국 지난 16일 신장투석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운명을 달리했다.
그녀의 죽음에 임권택 감독을 비롯한 신성일, 신영균, 윤일봉, 정혜선, 태현실, 문희, 한승헌을 비롯해 안성기, 한지일, 김동호, 김창숙 등 영화인들의 조문 행렬은 끊이질 않았으며 이 외에도 많은 이들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가슴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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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고 이듬해인 1954년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인 신 감독과 그때부터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1976년까지 130여 편을 작업하며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다.
그러다 신 감독과 이혼 후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으며,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재회했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사랑 사랑 내 사랑’(1984)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 영화제 수상이었다.
이후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한 후 10년간 망명생활을 하다 1999년 영구 귀국했다.
고국에 돌아온 후에도 활발을 활동을 이어갔다. 지난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 등을 기획 및 제작했다.
지난해 1
유족으로는 장남인 영화감독 신정균을 비롯해 2남 2녀가 있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고인, 부디 하늘에서는 편안하게 쉴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장지는 경기도 안성 천주교공원묘지다.
kiki2022@mk.co.kr[ⓒ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