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TV나 영화에서 본 연기는, 깊은 내공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다. 무대 위에서 만난 그녀는 그 어떤 젊은 배우들보다 빛났고,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타고난 연극인, 배우를 천직으로 믿고 평생을 살아온 서이숙(48)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서울 국립극장 근처의 한 카페에서 ‘줄리엣’의 보모 역으로 따뜻하고 친숙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를 만났다.
서이숙은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기념 연극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지난 9일부터 관객과 만나고 있다. 충무로의 실력파 대세 커플인 박정민과 문근영이 각각 ‘로미오’와 ‘줄리엣’을 맡았고, 그녀는 ‘줄리엣’의 보모로 분해 손병호(신부 역)와 함께 작품 전체의 무게감을 든든하게 책임지고 있다.
주말극에 이어 일일극, 미니 시리즈 등 쉼 없는 방송 활동 가운데서도 꾸준히 무대를 찾는 그녀였다. “이렇게 바쁜 데 연극까지 챙길 여유가 있느냐”고 물으니 “꼭 해야 하는 일이라 놓을 수가 없다. 점점 힘들어지지만 나 스스로와의 약속”이라며 미소 지었다.
![]() |
무대가 무섭고 두렵다? 너무도 의외의 답변이었다. 바쁜 활동으로 체력 적으로 힘들 순 있겠지만, 그 누구보다 무대 위를 자유롭게 뛰놀던 그녀였기에, 무대가 무섭다는 말에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녀는 “때로는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게 바닥이 났구나’ 하는 생각, 슬럼프 아닌 슬럼프가 오면서 무대에 서기가 무섭더라. 스스로 내 연기를 못 봐주겠더라”며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다 이내 “오랜 경력의 배우가 이런 이야길 하니 이상해요?”라며 미소를 짓는다.
“나이가 들고 연륜이 쌓이면 할 수 있는 역할이 더 많아지고 연기 스펙트럼도 한 없이 넓어질 줄 알았지. 그래서 뭐든 잘 할 줄 알았고, 마음껏 연기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오히려 좁아지고 있더라고. 딜레마죠. (웃음) 특히 TV에선 비슷한 역할, 강하고 악한 연기만 하다 보니 변화에 대한, 동시에 연기에 대한 갈증은 오히려 더 커졌어요. 그래서 되도록 무대 위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요. 나이가 든 선배로서 후배들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지만, 무대는 내게 배우로서의 생명력, 열정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죠.”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20-30대 젊은 층을 타깃으로 고전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리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잘 알려진 대로 셰익스피어 원작대로 원수 집안인 몬태규가 로미오와 캐플릿가 줄리엣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았고 어렵지만 아름다운 대사들을 변형 없이 옮겼다.
“처음엔 조금 현대화 된 유모를 상상했지만, 고전의 미를 강조하다 보니 전통적인 유모가 돼버렸죠. 여기에 ‘줄리엣’의 엄마 역할이 없어지면서 ‘줄리엣’을 아끼는 엄마의 감정을 유모에게 일부 투영하게 됐고, 본래 유모가 지닌 따뜻함과 유쾌함, 코믹함이 극대화됐어요. 본래가 ‘숨구멍’ 같은 역할을 해줘야 하는 인물이기에 관객들에겐 가장 친숙하고 쉬운 인물일 거예요.”
그녀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고전을 쉽고 재미있게 관객들에게 전해 줄 수 있다는 점은 의미가 깊지만 배우 각자의 개성이 좀 덜 담긴 것 같아 그런 부분은 좀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연극의 힘은 결국 앙상블의 힘. 각 배우들 개개인의 매력이 따로 있고, 이것들이 다시금 하나로 조화롭게 뭉쳐 앙상블을 만들고, 이 앙상블이 결국 작품 전체를 감싸는 완성된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 다는 게 가장 큰 강점인데, 고전 자체의 색깔을 너무 살리려다 보니 그런 부분이 조금은 묻힌 것 같아 아쉽긴 해요. 그럼에도 불구, 매 공연마다 관객들이 뜨거운 호응과 호평은 보내줘서 감사드려요. 기특한 후배들, (문)근영이와 (박)정민 덕분이죠. 하하!”
![]() |
“무대는 관객들과 어떤 장애물 없이 만나는 신성한 곳이고, 나를 배우로 만들어준 가장 의미 있는 장소에요. 그래서 늘 최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죠. 정말 긴 시간을 무대 위에서 보내왔지만 주로 저는 주목 받는 자리가 아니었어요. 무대 위 수많은 배우 중 한 명, 주로 병풍이었고 작은 조연이었죠. 하지만 후회하거나 불행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관객들이 늘 나를 본다고 생각하며 연기했고, 무대 위에서 받는 박수는 늘 벅찼어요.”
곧 쉰을 바라보는 그녀였다. 인생의 대부분을 무대와 함께 했고, 오로지 연기만 하며 살아왔는데도 여전한 애착과 뜨거운 열정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가진 것도, 잘난 것도, 특별한 것도 하나 없던 내가 젊은 시절을 오롯이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던 건 무대 덕분 이었다”며 웃었다. 눈빛은 반짝였고 목소리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 시절, 주변에서는 분명 다 내게 연기를 잘 한다고는 하는데 주목 받을 기회는 좀처럼 오질 않았어요. 하지만 그래서 절망에 빠지거나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죠. 아직 내가 준비가 덜 된 것뿐이니까. 어떤 문제에 직면하면 외부가 아닌 내 자신에게서
-②편에 계속-
kiki2022@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