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영화의 벗어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공식이 있긴 하지만 그 틀 안에서 할 수 있는 변주는 다 했어요. 되도록 현실감 있고 더 설득력 있게, 합리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수 있도록 제 능력에 한 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았기에 멋을 부리지도, 웃기려고도 하지도 않았어요. 언제까지 우리 국민들은 제 나라의 그 어떤 도움도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지키고 살아남아야만 하는 걸까요?”
‘판도라’ 박정우 감독이 흉흉한 시국과 맞물려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말 한마디 하기도 무섭다”며 난감해 했다.
1일 오전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인사 대신 “저 좀 살려 주세요!”라며 웃었다.
박 감독은 “제작부터 오늘까지, ‘판도라’로 제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감당할 수 있겠어?’입니다. 어쩔 수 없이 시국과 연결돼 있긴 하지만 영화를 만든 본래 취지가 가려질까봐 사실 걱정이 많네요”라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어 “언론‧배급 시사 이후 주변의 반응들을 살펴보니 예상한 것보다 관객들이 더 세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며 “시국 때문에 수위를 일부러 낮추고 아끼던 장면도 고민 끝에 삭제했는데도 반응이 너무 뜨겁다. 청와대 이야기 부분에 예상 보다 너무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박정우 감독의 신작 ‘판도라’는 국내 최초 원전을 소재로 한 재난 블록버스터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에 이어 한반도를 위협하는 원전사고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 대한민국 초유의 재난 속에서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박 감독은 “4년 전 전작 ‘연가시’를 마치고 나서 본격적으로 ‘판도라’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개봉이 안 될 줄 알았다”며 운을 뗐다.
“일본 후쿠시마 지진 이후 국내 상황을 보아하니 역시나 아무것도 대비하는 게, 변화되는 게 없더라고요. 분명 우리나라 역시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 그리고 ‘원전’ 등의 대형 재난 사고 등에 대해 좀 더 경각심을 갖고 점검하고 되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대비책에 대한 그 어떤 준비의 조짐도 없었죠. 상상만으로도 끔직한데 말이죠.”
‘판도라’의 영화 제작이 확정되기 전 그는 먼저 집필 작업에 몰두했다. 영화화가 안 되더라도 ‘원전 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현실적이고 완성도 높은 책을 만들겠노라며 치밀한 작업을 거쳤다. 예상대로 영화 제작에서부터 개봉하기까지, 4년간 수없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박 감독은 “책을 쓰면서도 영화 제작에 대한 기대감은 낮았다. 저예산 다큐멘터리가 아닌 상업 영화라면 분명 엄청난 자본이 들어가야 할 텐데, 누가 투자해주겠나 싶더라”라며 “책 쓰는 것조차 포기하려고 했지만, 해오던 작업이 아까워서 끝까지 완성했다”고 말했다.
“힘겹게 책을 완성했는데 투자사를 찾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세 군데 이상을 옮겨 다녔는데, 모두 책에 대한 반응은 굉장히 좋았어요. 하지만 실무적인 부분,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거절당했고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NEW를 만났죠. 고민 끝에 대표님이 ‘그래도 이런 영화를 해야 우리 영화인들이 긍지를 갖고 나아가는 것 아니겠어요? 의미를 갖고 함께 가봅시다’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감사했죠. 사실 ‘원전에 대한 찬양’만 아니라면 청와대‧정권에 대한 이야기나 다른 부분들은 요청한다면 전부 수정할 각오까지 했어요. 저에겐 ‘원전’의 위험성, 관리의 중요성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감사하게도 그 어떤 부분도 수정 요청이 없었어요.”
난관은 어디 이뿐이었으랴. 하지만 기적처럼 영화는 만들어졌고, 영화 속 이야기는 박 감독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현실이 되어갔다. 처참했던 기억,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너진 안전 시스템과 무능한 정부를 목격했고,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대규모 지진도 발생했다. 현재의 시국은 겉잡을 수없이 흉흉해진 상태다. 상상 속의 일들의 상당 부분이 현실이 됐다.
박 감독은 “너무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나는 예언가도 아니고, 다만 상상하면 무서운, 그래서 더 열심히 되돌아보고 준비해야 할 것들을 말하고자 하는데 이 모든 게 현실로 나타나다니. 우리 작품은 개봉 전부터 졸지에 ‘사회 고발’ 영화로 낙인찍히게 됐다”며 한숨 쉬었다.
“일부러 영화에 대한 홍보나 이야기를 할 때도 시국이니 현실이니 원전이니…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휴머니즘, 가족애가 녹아 있는 상업 재난 영화로 이야기하자고 내부적으로 이야기 했어요. 필요 이상으로 시국과 연관되고 싶지 않았고, 나라의 비극을 이용해 주목받고 싶지도 않았어요. 영화를 보시는 분들이 알아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느끼고,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죠. 오히려 현실을 떠오르게 하는 민감한 대사, 장면들을 삭제하고 최대한 ‘원전 재난’ 그리고 휴머니즘에 포커스를 집중시키고자 했죠.”
그는 “물론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현실을 떠올리고 그래서 더 갑갑하고 분노하며 몰입하겠지만 정치권에 대한 분노보다도 원자력 발전에 대한, 안전 대비의 중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거듭 강조했다.
“우리 영화의 가장 큰 그림, 궁극적인 바람이자 목표는 다가올 대선에 아주 미약하게나마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보수냐, 진보냐 이런 정치적 성향을 모두 떠나서 ‘국가의 안전한 관리’가 누군가의 정치 공약이 될 정도로 중요한 사안으로 떠올랐으면 좋겠고, 특히나 ‘원전 관리의 중요성’이 수면
‘판도라’에는 김남길 김명민 김영애 문정희 김주현 등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오는 12월 7일 개봉.
사진 유용석 기자/ kiki2022@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