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스타투데이 한인구 기자]
배우에게 작품들은 나무가 품은 나이테와 같다. 시대와 함께 호흡하면서 쌓은 이들의 영화, 드라마, 연극은 시간이 흘러도 배우를 설명하는 이름이 된다. 배우 이청아(32)는 2002년 데뷔해 착실하게 배우의 나이테를 늘려왔다. 지난 2004년 영화 '늑대와의 유혹'은 여전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MBC 드라마 '운빨 로맨스'는 새로운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든든한 뿌리가 됐다.
"한설희 역할을 하면서 배운 게 많아요. 그동안 해왔던 역할과는 무척 달랐죠. 캐릭터를 준비하는 시간이 짧아 망설이기도 했지만, 이 작품을 하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것 같아요. 한설희가 제수호(류준열)를 대하는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같은 씩씩한 모습은 원래 제 성격에서 나온 거죠."
이청아는 '운빨 로맨스'에서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최건욱(이수혁)의 에이전트 한설희 역을 맡았다. 똑 부러진 일솜씨와 첫사랑인 제수호를 되찾기 위해 애쓴 인물이었다. 제수호와 다시 인연을 맺지는 못했지만, 당당함은 잃지 않았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역할을 주로 해왔던 이청아의 과감한 변신이기도 했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설희를 배우고 싶었죠. 나도 이렇게 살았으면 속이 시원했을 것 같아요. '꽃미남 라면가게'를 하면서는 화를 내는 법을 배웠죠. 다른 캐릭터를 할 때마다 내 삶에서 넘어가지 않았던 벽이 넘어가는 걸 느껴요. 인생의 강박과 결점들을 작품으로 극복해 갑니다."
OCN '뱀파이어 탐정'에서 요나 역으로 촬영 중이던 이청아는 곧이어 '운빨 로맨스'에 합류했다. 그만큼 연습하고 캐릭터를 분석할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한설희를 표현하는 데 영어 발음과 화려한 옷의 도움을 받았다.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요나에서 한설희로 재빨리 안착할 수 있었다.
"작품을 시작하기 전, 주변에 도움을 많이 청했어요. '한설희는 외모적으로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죠. 이청아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준비했어요. 스타일이나 메이크업 등 스태프들이 잘 챙겨줬죠. 첫 촬영이 제수호와의 과거 장면이었는데, 한설희를 이해할 수 있었죠. 회상 장면의 힘을 받아서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어요."
'운빨 로맨스'는 제수호와 심보늬(황정음)의 로맨스가 중심축이었다. 한설희는 이들 사이의 훼방꾼이었다. 전형적인 악녀로 그려지는 듯했지만, 결국 두 사람의 사랑에 박수를 보냈다. 한설희가 있었기에 주인공들의 사랑이 더 애절할 수 있었다.
"촬영을 하면서 제가 악녀가 되는 줄 알았죠. 중간에 이해하기 힘든 장면도 있었어요. 악역이 이유 없이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은 주인공의 마음을 시청자에게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걸 알았어요. 인물 안의 개연성보다는 작품 전체를 위한 역할을 해야 하는 거죠."
이청아는 '필요하다면 욕을 먹어도 된다'라는 마음으로 한설희를 연기했다. 다른 인물들보다 영어 발음을 정확히 한 것은 극 중에서 이질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주연보다 이들을 받쳐주는 조연은 그만큼 어려운 역할이었다.
"주인공은 자신이 잡아가는 톤이 작품의 톤이 되죠. 조연은 각자의 이야기에 타당성이 없어도 특징을 통해 주인공을 도와요.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조금만 실수해도 캐릭터가 흔들리고, 뻥뻥 구멍이 나죠. 타당성과 흐름보단 극에 도움이 되는 것을 해야 하더라고요."
데뷔 15년 차에 30대 배우가 된 이청아는 조금씩 역할 폭을 넓혀가고 있다. 몸에 머금고 소화할 수 있는 배역들이 늘어날수록 삶의 울타리도 커진 것이다. 일찍 배우 활동을 시작해 다른 직업군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것을 아쉬워했다.
"30대가 되면서 덜 조심스럽기로 했어요. 어릴 때는 제 안의 세상이 좁으니까 작은 것 하나에도 큰일이 생기는 것 같았죠. 하지만 생각했던 일들이 벌어져도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더라고요. 머릿속에서 키운 공포가 머릿속에 있을 때 제일 크다고 느꼈죠. 이제는 툭 저질러보려고 해요.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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