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둥이 아빠’에서 오랜 만에 ‘배우 송일국’으로 돌아와 입지를 더 다져할 시기에 돌연 뮤지컬 무대라니…소속사는 물론 가족과 지인들 모두 반대했죠. 하지만 이번 생애엔 불가능한 꿈으로 여겼던 일이 코앞에서 손짓하는데 어떻게 잡지 않겠어요? 뮤지컬 배우는 제가 생각하는 ‘모든 재능을 갖춘, 진정한 배우’였거든요. 감히 저는 엄두도 못 낼…제 공연을 본 어머니가 신랄하게 비판하시긴 했지만, 다행인 건 하루 하루 나아지고 있다는 겁니다. 하하!”
얼마 전 배우 송일국을 보았다. TV나 영화관이 아닌 뮤지컬 무대에서다.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줄리안 마쉬’로 등장한 그의 모습은 참으로 신선했다.
송일국이 분한 ‘줄리안 마쉬’는 브로드웨이 최고의 연출가이자 극중 ‘프리티 레이디’의 감독. 멋진 무대를 만들기 위해 카리스마 있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강한 리더의 면모를 지녔다. 강인함 속에 따뜻한 내면까지 지닌 매력적인 외강내유 캐릭터.
그의 연기는 예상대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쉬운 점 또한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소문난 노력파일지라도, 기초가 없는 노래 초짜가 단시간 내 완벽하게 노래를 부르는 데는 한계가 있을 테니 말이다.
“(제 노래 분량이)딱 두 곡이에요. 근데 이 두 노래가 절 미치게 하고 있어요, 하하! 음악이나 노래와는 워낙 재주도, 인연도 없어서 그런지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만큼 늘진 않는 것 같아요. 작품 자체가 워낙 흥겹고 재미있어서 저는 너무 행복한데 혹시나 저 때문에 공연에 피해가 갈까봐 한상 걱정이죠. 실력파 후배들에게 묻어가고 있습니다. 하하!”
그는 덤덤하게, 그리고 호탕하게 웃었지만 사실 연습 기간 중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던 출연자 중 한 명이다. 개막 전 공식석상에서 수차례 “영광스러운 꿈의 무대”라고 밝힌 만큼, 그의 노력은 헌신적이었고 열정적이었다. ‘브로드웨이42번가’ 관계자들은 ‘악바리 근성에 놀랐다’ ‘스타답지 않은 성실함에 존경스러웠다’ ‘그 어떤 배우보다 지독한 연습벌레’ ‘감동스러울 정도로 애착이 대단했다’ 등 입을 모아 그의 노력에 경이로움을 표했을 정도.
“최정원 선배의 추천으로 덜컥 기회를 잡긴 잡았는데…저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걱정이 많았죠. 반대도 심했고요. ‘삼둥이 아빠’로 큰 사랑을 받았지만, 본업인 배우로 복귀한지 얼마 안 된터라 내 분야를 좀 더 확고히 다져야 하는 시기였거든요. 하지만 오랜 꿈이었기 때문에 정말 하고 싶었고, 다행히 공연과 인연이 깊은 소속사라 나중에는 적극 지원해줬어요. 어렵게 시작한 도전인데 사활을 걸어야죠! 연습하는 매일, 매순간이 제겐 치열했어요.”
가장 큰 과제는 물론 노래였지만, 사실 ‘줄리안 마쉬’는 노래보단 연기력을 요하는 캐릭터다. 때문에 인물 연구도 결코 게을리 할 수 없었다고. 그는 가장 먼저 연극배우 겸 연출가인 윤석화를 떠올렸다고 했다. “롤 모델을 윤석화 선생님으로 삼고 역할을 준비했어요. 전작 연극에서 윤석화 선생님이 연출을 맡았었는데 그 분이야말로 딱 제가 찾던 ‘줄리안 마쉬’였어요”라고 했다.
“그 분은 공연 예술 분야에서는 한 마디로 ‘천재’에요. 다른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하죠. 본인이 연극계 톱스타였는데, 무대 아래로 내려와 연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대단해요. 열정과 디테일, 감각과 넓은 시야 등 모든 면에서 정말 최고시죠. 그 분을 떠올리며 나만의 ‘줄리안 마쉬’를 만들어 갔어요.”
결국 송일국표 ‘줄리안 마쉬’의 뼈대는 윤석화. 이를 에워싸는 살점들은 남경주로 형상화됐다. 그는 “남경주 선배의 ‘줄리안 마쉬’를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따라했다. 100번, 아니 1000번을 넘게 그의 공연 영상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남경주 선배님의 절반만이라도 따라가자’는 목표를 가지고 손동작, 표정, 톤 하나 하나를 따라했어요. 선배님이 직접 공연 관람도 해주셨는데, ‘저 친구는 나와는 전혀 다르게 ’줄리안 마쉬‘를 해석 했네’라고 말하셨대요. 정말 충격적이었죠. 난 오로지 그 분만을 모방했는데…하하하!”
아들의 새로운 모습을, 남편의 변신을 지켜본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역시나 그는 솔직하고 유쾌하게 이야기 했다.
“’생각보다 잘했다’고 따뜻하게 응원해준 아내와 달리 어머니(김을동)는 엄청 잔소리를 하셨어요. 제 공연은 물론 저와 더블 캐스팅된 이종혁 배우의 공연도 모두 관람하셨는데, ‘그 친구는 아주 노련하게 잘 하는데 넌 아니다. 잘 보고 좋은 점들을 배우고 너만의 스타일을 연구하라’고 냉정하게 말씀하셨어요. 신랄한 비판도 수시로 받았죠.”
“이종혁만 칭찬해줘서 서운하거나 질투나진 않았냐”고 물으니 “전혀. 내가 봐도 잘 잘하더라”라며 쿨한 반응을 보였다.
“‘더블 캐스팅’이라고 해서 쓸데없는 경쟁심이나, 부담감을 갖진 않았어요. 그저 전 무대가 처음이니, 너무 부족하면 상대방에게 누가 될 테니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했죠. 종혁씨 보다 잘난 제 자랑이요? 음, 연출님이 (제가 워낙 기본이 없어서) 자기가 지금까지 가르친 배우들 중에 가장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하셨어요. 하하하!”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고 유쾌한 입담이 돋보였지만, 알고 보면 송일국은 인터뷰 내내 자신을 ‘중고 신인’, ‘노래 초짜’, ‘부족함 투성이’ 등으로 칭하고 있었다. 내면의 깊은 곳까지 묻어있는 겸손함이 느껴지는 배우.
“나는 평생의 꿈을 이루는 건데, 그게 남에게 누가 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정말이지 뮤지컬 배우는 노래와 춤, 연기까지 모든 분야를 섭렵한 ‘넘사벽’ 같은 존재였어요. 지금도 무대 위에서 재능을 뽐내는 후배들을 보면 존경스럽고 부러운 마음뿐이에요. 아직 부족하지만 한 단계씩 성장해가는 모습을 꼭 보여드리고 싶어요. 무대 위 춤추는 후배들의 얼굴에서 느껴진 기쁨과 희열, 그게 ‘뮤지컬’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제 얼굴에서도 언젠가 그
한편,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는 브래드포트 로페스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펜실베니아 출신의 소심하지만 활기 넘치는 코러스 걸 ‘페기 소여’가 전설적인 히트메이커이자 연출가인 ‘줄리안 마쉬’를 만나 마침내 뮤지컬 스타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8월 28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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