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그 누가 알았을까. 올해로 28년차 배우이자, 각종 연기대상을 섭력했던 배우 고현정이 촬영장의 막내가 될 줄은.
고현정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카리스마’ 혹은 ‘여장부’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8년이라는 연기 인생에서 유난히 굴곡도 많았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대상을 안겨주었던 작품 또한 ‘선덕여왕’의 카리스마 넘치는 악녀 미실, 혹은 ‘대물’의 정의감 넘치는 여성 대통령 서혜림과 같은 선 굵은 작품들이었다. 촬영장을 호령할 것만 같은 고현정이 안방극장 복귀작으로 김혜자, 고두심, 나문희, 윤여정 신구, 주현 등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대배우들이 버티고 서 있는 tvN 금토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를 선택한 것은 의외성에 가까웠으며,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이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 아닌 37세의 노처녀라는 사실은 더욱 더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평균나이 75세, ‘꼰대’라고 불리는 시니어들의 ‘황혼 청춘예찬’을 그리는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극중 화자이자 난희(고두심 분)의 ‘개딸’이 된 고현정은 모두의 걱정을 비웃듯 무척이나 수수했다. 하얀 얼굴 위로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과 부스스함을 정리하게 위 대충 묶어 올린 머리, 집안에서 목이 늘어난 티를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은 무척이나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심지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와 색조라고 찾아보기 어려운 얼굴은 실제로 이제 막 씻고 나온 민낯을 엿보는 것만 같은 착각까지 일게 만든다.
‘디어 마이 프렌즈’ 속 박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 그녀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카리스마 넘쳤던 악녀 미실과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친숙하다. 사생활을 감추며 완벽하게 꾸며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고현정이 신비주의를 벗자, 나타난 것은 너무나도 보편적인 ‘보통의 여성’의 모습이었다.
고현정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89년 미스코리아 선으로 당선되면서부터였다. 큰 키에 서구적인 이목구비,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랑했던 89년 미스코리아 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우로서 대중고 만나게 된다. 90년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서 황말숙 역으로 연기신고식을 치르게 된 고현정은 이후 ‘두려움 없는 사랑’ ‘여자의 방’ ‘엄마의 바다’ 등을 통해 연기생활을 이어나갔다. 차근차근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나가던 고현정은 95년 운명과도 같은 작품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귀가시계’로 불릴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자랑했던 전설의 드라마 ‘모래시계’의 여주인공 윤혜린 역을 연기하게 된 것이다.
아련하면서도 티 없이 맑은 매력으로 남심을 뒤흔든 고현정은 ‘모래시계’ 이후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을 받으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 정점의 자리에서 고현정은 재벌과의 결혼을 발표함과 동시에 연예계를 홀연히 떠났고, 갑작스럽게 젊고 재능 있는 여배우를 잃은 안방극장은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했다.
그리고 8년여 동안 한 재벌가의 며느리로 살던 고현정은 2003년 다시 대중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혼을 하고 다시 배우라는 직업으로 돌아온 것이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결혼생활이었지만, 그럼에도 고현정은 누군가를 원망하기 보다는 자신이 부족하고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혼 결정에 후회는 없다고 고백했다. 원 없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연예계로 다시 돌아온 고현정은 2005년 ‘봄날’로 활동의 기지개를 켰다.
“제가 지금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엄마의 모습이 자랑스럽게 각인되길 바라서예요. 이 다음에 아이들이 커서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으로 엄마를 찾을 때, 인생 전체를 흔들어놓지 않을 만큼 앞뒤가 맞는 상태, 아주 산뜻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어요.”(2009년 12월 경향신문 인터뷰 中)
꽤 오랫동안 쉬었음에도 고현정의 연기력은 녹슬지 않았고, 그동안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이후 고현정은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고현정은 또 한 번의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 미실이라는 역과 만난 것이다. 냉정하면서도 치열하게 연기해 온 고현정은 ‘악역 전성시대’를 열 뿐 아니라, MBC와 이듬해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여배우’임을 본인 스스로가 증명해 나갔다. “이혼 후에 조금 까불까불하면서 살려고 했는데, 다시 진지해야 할 것 같다”는 의미심장한 고현정의 백상예술대상 대상 수상소감은 대중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진지하게 할 것 같다’고 말한 고현정의 이후 행보는 예능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였다. ‘무릎팍 도사’를 통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고현정은 2012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SBS 토크쇼 ‘고쇼’를 이끌며 진행실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어쩌면 자신의 진짜 민낯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신비주의’ 혹은 ‘대배우’와 같았던 고현정의 ‘대중과의 거리 좁히기’는 알게 모르게 꾸준하게 지속돼 왔고, 이는 지금의 ‘디어 마이 프렌즈’로 개딸로 이어졌다.
‘개딸’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된 것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시초인 ‘응답하라 1997’부터이다. 항상 사고치고 부모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딸 성시원(정은지 분)을 향해 “딸아 딸아 개딸아”라고 어이없어 하던 성동일의 대사는 이후 이 세상 성질머리가 대단하고 부모에게지지 않는 세상의 딸들을 일컫는 말로 정착됐다. 이후 수많은 개딸들이 나왔지만, 고현정표 개딸은 안방극장의 딸들을 울린 개딸은 없을 것이다.
친하면 친할수록 짜증을 내고 ‘내가 알아서 한다’며 부모에게 소리치는 것이 세상의 딸들 아닌가. 꼭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는 개딸이 아니다’에 손을 들 딸들은 얼마나 될까. 아마 수많은 개딸 중에서도 고현정표 개딸 박완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대중과 거리가 느껴졌었던 그녀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그려내기 때문일 것이다. 난희와 피가 나도록 싸우고 울고 그리고 화해하고, 아픈 엄마의 모습에 무너지고 눈물 흘리며 후회하는 완의 모습은 공감을 넘어 찐한 감동을 느끼게 한
세상 평범한 개딸들의 민낯을 드러낸 고현정. 고현정이 배우로서 바라는 그리고 꿈꾸는 미래는 무엇일까.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싫어하는 사람이든 작품에서의 연기가 기가 막혔다는 말을 모두 할수 있게 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2011년 1월 마이데일리 인터뷰 中)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