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충무로의 괴물신인’이라는 명칭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영화 ‘검은사제들’에서 악령에 빙의된 소녀로 보는 이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배우 박소담이 이번에는 연극 ‘렛미인’을 통해 신비로운 뱀파이어 소녀가 됐다. 악령에서 벗어나니 이번에는 피를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새빨간 피를 맛있게 먹는 박소담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사랑스럽다.
“많은 이들이 ‘무서운 모습만 보여줘서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어보시는데 사실 그저 연기일 뿐이잖아요. ‘검은사제들’의 영신이도 그렇고, ‘렛미인’의 일라이도 그렇고. 무서운 모습만 있다면 문제겠지만 저 생각보다도 더 멀쩡한 아이에요. (웃음) 만약 제 성격 자체가 어두웠다면 그런 연기들을 못했을 텐데, 제가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 걱정이 없어요.”
그래도 명색이 여배우인데 피를 뒤집어 쓴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말을 하자 도리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자체가 복”이라며 해맑게 웃었다. 피 맛에 대해서는 천진하게 “달다”고 답을 한다.
“피 맛이요? 그냥 달아요. 특수효과로 만들어지는 피가 따로 있는데, 식용 피의 경우 물엿으로 만들어 져서 기본적으로 달아요. 프레스콜 당시 피를 먹는 장면이 사진에 찍혔을 때 다른 사람은 무서울 수 있겠다 싶었지만, 저로서는 일라이를 가장 잘 표현한 사진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라이에게는 피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식량이고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박소담이 출연하는 ‘렛미인’은 스웨덴에서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영화 역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지만, 연극 ‘렛미인’의 경우 많은 ‘렛미인’ 중에서도 스웨덴 버전의 ‘렛미인’의 감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무대의 배경이 되는 자작나무 숲이라든지, 무브먼트로 표현된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 등은 영화와 비슷한 듯 또 다른 매력을 전해준다.
“‘렛미인’은 비현실적이에요. ‘뱀파이어’라는 소재만으로도 비현실적이죠. 비현실적인데 어느 순간 보다보면 ‘비현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강한 감동이 있어요. 오스카가 처한 상황도 그렇고, 우리나라 관객들이 공감하고 마음 아파할 수 있는 요소들이 곳곳에 있는 것이죠. 무대효과도 뛰어나서 세련됨을 느낄 수 있고…‘렛미인’은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극이에요.”
박소담이 ‘렛미인’에서 맡은 역할은 영원히 늙지 않는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를 연기하게 됐다. 여자도 남자도 그 무엇도 아니었던 일라이지만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소년 오스카와 만나 친밀감을 느끼고 그의 여자친구가 되며 아무 조건 없이 그를 보호하는 존재가 된다.
물론 일라이가 무조건 좋은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라이가 순수하다고 말하기에는 ‘인간사냥꾼’이라는 하칸이라는 존재가 걸리기 때문이다. 일라이가 먹을 피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그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염산을 삼키며 죽음을 선택하는 하칸 역시 일라이와 처음 만났을 때는 오스카와 같이 어렸다. 젊었던 하칸과 사랑을 나누었던 일라이는 그가 늙고 병들어 가면서, 하칸 대신 오스카에게 간다. 이는 분명 일라이와 오스카의 사랑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라이가 살아남기 위해 남자를 선택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사진=정일구 기자 |
“일라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어요. 하칸을 처음 만났을 때도 오스카와 만났을 때만큼 좋았을 텐데, 그리고 분명 이들 이전에 일라이에게 또 다른 남자들이 있었겠죠. 그것만 봤을 때는 ‘일라이 나쁜 애 아냐’라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그렇고 은지언니(일라이 역 더블캐스팅)도 그렇고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존 티파니 연출님이 ‘일라이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보낸 것이 아니냐’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그제야 일라이의 외로움이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세상 그 누구보다 많은 이별의 아픔을 겪은 존재가 바로 일라이잖아요. 고독했던 일라이에게 순수한 오스카가 다가왔고, 빈 부분을 채워준 거예요. 일라이 역시 오스카의 외로움을 알아차리고 채워줬고요. 1차원적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최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했어요.”
박소담이 연기하는 일라이는 기존의 일라이에 소녀스러움이 더해졌다. 피를 갈망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측은하며, 오스카와 만나 웃고 떠드는 장면은 천진함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장면이 있는데, 바로 오스카와 함께 서로의 처지를 잊을 만큼 행복한 하루를 보내다가 헤어지는 장면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오스카가 옆에 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기에 헤어져야 하는 일라이와 오스카, 순수한 두 영혼이 만나서 사랑을 하다가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이 너무 슬펐어요. 그래서 최대한 제가 느낀 감동을 관객들도 느낄 수 있게끔 노력하고 있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재학당시 수 없이 올랐던 연극무대였지만, 데뷔 후 처음으로 오르는 연극무대는 천하의 박소담도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더구나 ‘렛미인’이 공연되는 공연장은 1000이 넘는 대극장이다.
“무대 적응은 하면서 좋아지고 있는 부분이라서 최대한 기술적인 부분이나 연습한 것들을 틀리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특히 3층에 있는 관객들에게까지 멀리 그리고 깊은 감동을 전달할 수 있도록 집중하고 있죠. 무대 적응은 하면서 좋아지고 있는 부분이라서 최대한 기술적인 부분이나 연습한 것들을 틀리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저 뿐만이 아니라 함께 연기하는 젊은 배우들 모두 감정을 우리끼리만 느끼면 안 되고, 관객 또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위해 모두 집중해 연기하고 있죠.”
‘괴물신인’으로 알려진 박소담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바로 ‘오디션의 여왕’이다. ‘검은사제들’ 오디션 당시 사자 소리·개 짖는 소리를 내면서 20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박소담이 ‘렛미인’ 출연을 위해 겨뤄야 했던 경쟁률은 600대1. 일라이가 되기 위해 오디션장을 찾은 수많은 사람 속에서 박소담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며 뜨거운 땀을 흘렸고, 이는 합격이라는 열매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움직임 워크샵이 진행된다고 해서 ‘이게 뭐지’ 했어요. 맨발에 트레이닝 복 입고 이름도 낯선 ‘움직임 워크샵’을 봤는데, 하다보니 오디션을 온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즐겁더라고요. 다시 학교로 다시 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오디션을 떨어져도 연기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갔으니 더 즐기면서 하자고 돌아갔는데 운이 좋게 캐스팅이 된 것이죠.”
처음 박소담의 연극 출연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의외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영화 ‘베테랑’에 이어 ‘검은사제들’ 드라마 ‘처음이라서’ 등을 통해 연기력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만큼 차기작 역시 영화 아니면 드라마가 될 것이라는 추측이 이어졌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데뷔 또한 단편영화인 만큼 대중이 보는 박소담과 연극과의 공동분모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접수하기 시작한 박소담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영역인 연극무대로 뛰어들었다.
연기력 하나로 제대로 ‘빵’ 뜬 박소담은 현재 무척이나 바쁘다. 연극 무대 뿐 아니라 드라마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만큼 쉴 틈 없이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건강상 무리를 느끼고 지칠 법하지만 “바쁘고 정신이 없지만 행복하다.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꾸준히 하고 싶어요. 졸업한 이후에는 영화와 드라마만 하다 보니 무대에 대한 두려운 부분이 있어서 ‘언젠가 한 번쯤 할 수 있겠지’ 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지 몰랐어요. 여러 가지로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저와 잘 맞는 역할이 있다면 계속 할 계획이에요.”
연기를 향한 박소담의 열정은 뜨거웠다. “연기를 즐길 수 있는 배우, 그리고 친근하고 인간적인 배우가 되고 싶다”고 자신이 꿈꾸는 배우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한 박소담은 나이가 들어서도 연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갈망했다.
“대사를 까먹어서 연기를 못할 때까지 연기를 하고 싶어요. 그만큼 오래 하고 싶어요. 때로는 후회도 하고 지칠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즐긴다면, 저를 보는 사람도 즐겁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그 옛날에 뮤지컬 ‘그리스’ 배우들을 보고 연기에 대한 도전의식이 생긴 것처럼, 무대 위에서 잘 즐기고 제 모습을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아요.”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 디자인=이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