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유지혜 기자]
◇ 권재관은 누구?
2005년 KBS2 ‘개그사냥’의 ‘개그쌍웅’ 코너로 정식 데뷔했으며, ‘폭소클럽2’ 등을 거쳐 1999년부터 KBS2 ‘개그콘서트’에서 활동 중이다. 대표적인 코너로는 ‘감수성’ ‘리액션 야구단’ 등이 있다. 개그우먼인 김경아와 2010년 결혼해 아들과 함께 세 가족이 알콩달콩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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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리액션 야구단’에서 ‘깐족’ 캐스터로 활약하고 있다. 독설과 깐족을 넘나들며 웃음 포인트로 자리매김했는데 코너는 어떤가. 초반에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지금도 선방 중이다.
A. ‘리액션 야구단’은 유니세프 같은 코너다.(웃음) 20명 정도가 정규군으로 있다면 상비군도 존재한다. 대규모 팀이다.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시간대도 좋은 타이밍이다. 시작한지도 크게 오래되지 않아서 좋은 반응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개그맨들은 별로 시청률에 민감하지 않다. 올라가면 그만큼 내려갈 걸 알기 때문에.(웃음) 퀄리티를 유지하는 게 목표다.
저는 매주 코너를 가지고 오는 그런 게 아닌 역할이라 편하게 하고 있다.(웃음) 제가 미국으로 길게 여행을 다녀온 후 밀려있는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개콘’에 바로 복귀하진 못했다. 8월부턴 해야지 하다가 김성원, 김기리가 코너를 짜고 있는데 거기서 ‘까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하더라. 많은 분들이 저를 추천해주셨다.(웃음) 그래서 자연스럽게 복귀할 수 있게 됐다.
보통 개그가 터지기 전에 있는 ‘전초전’이 한 20~30초 정도 존재한다. 그 전초전을 거친 후에 웃음이 터지는데, ‘리액션 야구단’은 그 전초전에 10초 안에 끝나야 한다. 그만큼 개그를 짜기는 어렵지만 보는 사람들은 ‘넋 놓고 보기’ 편한 개그다. 짧고 한 방에 ‘탁’ 쳐야 하는 코너인데, 제가 제일 못하는 타입이다. 다행히 저는 ‘관전’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알맞은 옷을 입었다고 생각한다.
Q. 얼마 전 자전거 여행을 길게 하고 왔다. 왜 하게 된 것인가.
A. 4개월 정도 ‘개콘’을 비우고 8월에 복귀했다. 제가 자전거를 원래 좋아하는데 ‘개콘’을 5~6년간 하루도 안 쉬었다. 개근상 받기 힘든 프로그램인데 독특한 케이스다. 그러다보니 한 번 쯤 일탈을 꿈꾸게 되더라. 우연히 인터넷 보는데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하는 사진을 봤는데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너 ‘10년 후’ 끝나고 바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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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딱 한 달 다녀왔다. 미국을 완전히 횡단하려면 3개월이 걸리는데 저도 가장이다보니 그 정도까지는 못 비우겠더라. 원래 15일 다녀온다고 아내에게 약속했는데 미국에 가서 ‘며칠만’ 하면서 늘린 게 한 달이 됐다.(웃음) 미국 여행이 정말 많은 전환이 됐다. 머리를 비우는 시간이기도 하고. 당시엔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좋은 생각밖에 안 난다.
Q. 어떻게 하다가 개그맨이 됐나. 꾸준히 개그맨만 한 건가.
A. 아니다. 저는 직장생활도 꽤 오래 했다. 개그맨 되기 전에 한 5년 정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 웃기다는 소리 많이 들었고 연극영화과를 가기도 했다. 그런데 ‘웃기다’는 말 때문에 하기가 더 힘들었다. 기대치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개그맨 공채를 봤는데 ‘나에게 미안할 상황은 만들지 말자’라는 생각에 뒤늦게나마 시험을 봤다.
그렇다고 함부로 회사를 그만두긴 어려워서 회사 다니면서 틈틈이 준비했다. 대학교 후배인 조윤호가 미용실에서 머리 말고 있던 시절 제가 불러내서 개그 짜자고 해서 함께 시험을 봤다. 3차까지는 갔는데 탈락했는데 예상했던 일이었다. 우리는 될 거라고 생각 안했다. 그런데 ‘폭소클럽’ PD님께서 회사 시간을 고려하면서까지 한 번 와서 개그 하라고 말해주셨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갔는데 통편집됐다. 그 통편집이 반복되자 결국에는 PD님도 ‘이제 갈 길 가라’라고 하시더라. 마지막 날에 짜장면 사주시면서 빈말로 ‘재밌는 거 있으면 가지고 와라’라고 했는데 바보같이 우리는 그걸 진심으로 알아듣고 방송 로비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20분 동안 코너 짜서 다시 갔다. 그랬는데 그게 터졌다. 그렇게 몇 회 촬영을 했다.
그러다가 ‘개그맨 지망생 데리고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서 한 번 해보라’는 제안을 받고 ‘봤지, 우리 놓기 싫어하는 거’ 이런 착각을 하며 갔다.(웃음) 그 ‘개그사냥’이 3연승을 하게 되면 ‘개콘’이나 ‘폭소클럽’ 정규 무대로 올려주는 거였다. 그 때 조윤호랑 고시 준비하듯이 했다. 회사 끝나고 와서 놀이터 같은 데에서 코너 짜고 연습하고 그랬다. 당시 가장 유력한 1위 후보였던 김원효를 역전하고 우리가 1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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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개그맨 시험을 볼 때 겪은 일화가 있다고 하던데.
A. 우여곡절 끝에 ‘폭소클럽’을 가게 됐는데 개그맨 공채 시험 한 달 앞두고 ‘폭소클럽’이 없어졌다.(웃음) 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시험을 준비했는데 ‘이번에 안 되면 그만하자’는 심정이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룰을 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험을 볼 때 들어가자마자 제가 면접관 자리에 앉았다. 당시에 면접관들이 하얀 서류철을 이용했는데 그 서류철도 문방구 다 돌아서 직접 준비해갔다.
그리고 PD랑 똑같은 포즈로 앉아서 ‘다음’을 외쳤다. 면접 어시스턴트 해주는 개그맨 선배들이 알아듣고 참가자처럼 해줬다. 제가 ‘저 친구 웃긴 애야’ 이런 멘트를 치니 다들 뒤집어졌다. 그대로 제가 1등했다. 그 다음 기수부터는 면접관 자리 근처에 넘어오지 말라는 선이 생겼다고 들었다. 개그맨 지망생 사이에서는 일종의 전설이 됐다더라. 제가 개그맨 시험의 ‘규칙’을 하나 만든 셈이다.(웃음)
Q. 그렇게 개그맨이 돼 기대주였을 텐데 어땠나. 힘들었던 건 없었나.
A. 사실은 10년 동안 제가 ‘개콘’을 했지만 한 5년간은 무명이었다. 정말 뭐가 없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안 되더라. 조바심을 냈었다. 나이도 나이였고, 뭘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저를 더 얽매였던 것 같다. 정말 박지선, 김준현 같은 아래 후배들이 잘했다. 현실이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커서 여행도 많이 했다. 여행하면서 ‘여유로움’을 많이 찾았던 것 같다.
아들이 정말 복덩이라고 생각하는데 결혼하고 나서도 1년간 일이 없었다. 아내가 임신하고 함께 태교를 했다.(웃음) 아기 나오기 전에는 꼭 ‘개콘’에서 한 방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나왔을 때 실직자로 있기 싫었다. 그런데 아기가 나오기 직전까지도 코너 두 개를 물먹었다. 그런데 아기 나올 때에 ‘감수성’이 통과됐다. 방송이 나오는 시기에는 다행히 아기가 태어난 직후였다. 정말 감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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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마음을 고쳐먹은 게 있다. ‘주인공을 절대 하지 말자’다. 그렇다고 주인공을 아예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제가 코너에서 깃발을 흔들던 잠깐 얼굴을 비추던지 간에 그것만으로도 행복해하자는 걸 깨달았다. 큰 꿈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열심히만 하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지금까지 해왔다. 우여곡절이 컸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걸어왔다.
Q. 우여곡절 끝에 걸어온 길이다. 앞으로도 지켜갈 개그를 위해 시청자에 한 마디 남긴다면.
A. 요즘 ‘개그가 위기다’라는 말을 많이 있다. 저는 조금만 기다려주셨으면 하는 말을 꼭 하고 싶다. 항상 노력을 정말 많이 하고 있다. 개그맨들이 들으면 가장 뿌듯한 소리가 있다. 여의도에 직장인 분들이 많이 다니시는데 그 분들이 잠깐 자판기 커피 마시면서 ‘어제 그 코너 봤어?’라는 대화를 나누는 거다. 우리도 그 ‘어제 그 코너 봤어?’라는 걸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주신다면 조속히 원상복귀하도록 하겠다.
개그맨들은 ‘개콘’이 잘 나갈 때와 지금과 다 똑같다. 여전히 열심히,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제 생각에는 무언가를 조금씩 내려놓을 때라고 생각한다. 코너의 틀이나 이런 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변화를 줘야 할 때라고는 생각한다. 계속 웃음을 위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달라.
유지혜 기자 yjh0304@mkculture.com/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
디자인=이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