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유지혜 기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루저’라는 단어를 유행시켰던 ‘루저의 난’을 기억하는가. 당시의 ‘루저’와 지금의 ‘루저’, 참 많은 부분에서 대접이 달라졌다.
지난 2009년 ‘루저의 난’은 KBS2 ‘미녀들의 수다’에서 한 여대생이 “키 180cm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이 여대생의 발언은 서양권에서 사용되는 ‘루저’의 의미, 즉 ‘패배자’ ‘실패자’로 받아들여지면서 수많은 남성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당시 이 발언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법원으로 향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는 일화는 발언이 일으킨 사회적 파장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후 ‘미녀들의 수다’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로부터 ‘제작진에 대한 징계’를 받았고, 해당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공개 사과문을 내보내야 했다. 그동안 여성들의 그릇된 남성관, 결혼관 등을 주제로 삼아 지적을 받았던 ‘미녀들의 수다’는 이 사건으로 하여금 내리막길을 걸었고, 대개편으로도 분위기를 전환시키지 못하며 결국 폐지를 하게 됐다. 해당 여대생은 당시 누리꾼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집중 폭격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대기업에 취직했는데 빗발치는 항의 메일로 결국 잘렸다더라”는 루머들이 돌 정도로 회자되고 있다.
↑ 사진=미녀들의 수다 캡처 |
이 사건으로 어쨌든 한국에도 ‘루저’라는 단어가 상륙했다. 처음 ‘루저’는 ‘미녀들의 수다’의 영향으로 외모 비하의 의미를 지닌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됐다. 하지만 비속어들이 으레 그렇듯 ‘루저’도 유행어처럼 번지고 자주 사용되면서 의미가 중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특히 ‘루저’는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던 ‘88만원 세대’ ‘삼포세대’ ‘청년 실업’ 등 20대들의 고충과 맞물리면서 ‘잉여’ ‘이태백’ ‘니트족’ 등과 같은 단어처럼 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됐다.
하지만 ‘루저’들이 대중문화계의 키워드로 자리 잡은 것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그룹 장기하와 얼굴들이 등장하면서 ‘루저 문화’는 하나의 하위문화로 여겨지게 됐다. 하지만 ‘장기하 현상’이라고 불리는 이 ‘루저 문화’는 지금의 ‘루저’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2008년 데뷔한 장기하와 얼굴들의 첫 앨범 ‘싸구려 커피’를 사례로 들 수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들은 “눅눅한 비닐 장판”에 누워 “남은 것도 없이 텅빈 나”가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한” 상황을 묘사하는 가사(‘싸구려 커피’)에서는 불안함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느리게 사는’, ‘여유작작한’ 모습을 은유하면서 ‘빠르게 가는’ 세태에 대한 거부감을 내재하기도 한다. 즉, 상대방을 비하하는 단어였던 ‘루저’를 나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로 만들고, 이를 기존 문화를 거부하는 대안 문화의 키워드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2010~2011년도의 웹툰계에 불어 닥친 ‘루저 웹툰’ 열풍도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김규삼의 ‘쌉니다 천리마 마트’, 하일권의 ‘목욕의 신’, 이말년의 ‘이말년 씨리즈’ 등의 웹툰들은 좌천된 사장과 어딘가 부족한 직원들,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목욕탕 때밀이(목욕관리사)로 취직한 전문대 졸업 백수와 같은 ‘루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런 루저 웹툰들은 ‘병맛’ 코드와 결합해 ‘유쾌한 루저’의 감성을 만들어냈다. 이런 ‘루저’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며 기성세대의 질서, 무의미하고 끊임없는 경쟁들을 탈피하는 모습으로 독자들에 통쾌함을 안기기도 했다.
경쟁 사회, 바쁘게 사는 사회의 대안 문화로 갈라진 ‘루저’는 한편 사회구조 속의 문제들을 풍자하는 단어로 변모하기도 했다. 대중문화 안에서 ‘루저 문화’가 한 갈래로 만들어지는 그 시기에 사회적으로는 ‘루저’라는 단어가 학벌구조, 체격이나 외모와 같은 개인의 요소들이 모두 상품화 돼가는 사회구조에서 밀려나는 청년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자리 잡아가게 됐다.
↑ 사진제공=CJ E&M |
학벌이 위주가 되는 학벌사회는 엘리트들을 대기업으로 안정적으로 고용해 줄 수 있을 때 제 기능을 한다. 하지만 IMF사태 이후 이 학벌체제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았고, 자연스럽게 위기는 치열한 경쟁을 불러왔다. 지금의 2030세대들은 기성세대에게는 ‘정치의식이 없다’ ‘패기와 낭만이 없다’고 저평가 받고, 아래로는 경쟁 체제에 나름의 질서와 방법을 강구해낸 세대들이 치고 올라오는 ‘사면초가’의 세대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경쟁은 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의 2030세대가 열패감에 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런 2030세대들의 자화상을 담은 것이 바로 지금의 ‘루저’ 키워드다. tvN ‘초인시대’의 병재, 창환, 이경처럼 취업은 늘 실패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도 쉽게 하지 못하고, 월세 방을 전전하며 부채에 시달려야 한다. 빅뱅의 노래 ‘루저’의 가사에도 “외톨이, 센 척하는 겁쟁이”가 등장하고, tvN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임시완 분)는 그렇게 고군분투를 했는데도 결국 정규직 전환에 실패했다. 이런 ‘루저’들이 주인공이 되면서 지금의 청춘들을 응원하기도, 아픔을 대신 드러내기도 하며 공감을 끌어내는 요소가 됐다.
우리나라 ‘루저’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작은 부정적으로 시작했다. 상대방을 비하하고 내리까는 단어였던 ‘루저’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게 되면서 지금은 때로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주장을 담기도 하고, 때로는 끝없는 경쟁에 지친 서로를 향한 위로를 뜻하는 단어가 됐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스스로를 ‘루저’라고 칭하며 다른 ‘루저’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등 과거와는 다른 자세로 ‘루저’를 받아들이고 있다.
<참고>
* 동아시아 루저문화의 계보 (글 윤영도, 제공 동아시아연구소, 2015. 03)
* 루저문화의 얼굴들 (글 최지선, 제공 오늘의 문예비평 2010 봄호)
* 루저는 ‘세상 속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글 한윤형, 제공 황해문화 2009 가을호)
유지혜 기자 yjh0304@mkculture.com/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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