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정예인 기자] 영화 ‘호산나’가 제6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며, 단편부문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했지만, 국내에서 만나보긴 어렵다.
물론 ‘호산나’가 단편 영화라는 점, 대중성보다 예술성을 높게 평가하는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점,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점을 미뤄봤을 때 대중을 상대로 선보이긴 어렵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호산나’는 베를린국제영화제 뿐만이 아니라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미장센단편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클레르몽페랑국제단편영화제의 초청을 받은 작품이다. 이만하면 한 번쯤은 국내 상영이 뭐가 문제인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호산나’는 성경의 한 구절인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시 118:25)로부터 출발하는 작품이다. 구원자가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을 때 펼쳐지는 비극적인 삶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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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호산나 스틸컷 |
평범하다 못해 우울증이 있을 것만 같은 소년 섭(지혜찬 분)은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 곁에서 성장한다. 섭은 언제나 후줄근하게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한 마디 말도 없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아버지가 개고기를 씻어오라면 죽은 개를 맨손으로 벅벅 문질러 씻고, 뇌성마비의 어머니의 배변 활동을 군말 없이 돕는 섭은 착하다면 착하게, 바보 같다면 바보 같이 보이는 인물이다.
이런 섭이 죽어가는 생명도 되살리는 구원자로 등장하니, 관객은 놀랄 수밖에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섭은 말없이 생명을 되살리기 바쁘다. 때문일까. 섭이 한 생명을 부활시키는 장면이 감동적이지 않고 오히려 불합리하게 보인다. 섭이 기껏 살려놓은 사람들은 도리어 그에게 “왜 살려냈냐”고 화를 낸다.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해도 모자랄 판에, 욕지거리를 퍼붓는 인물들이 다시 한 번 관객을 의아하게 만든다.
‘호산나’가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이라는 점은 또다시 드러난다. 섭의 어머니는 발작을 일으키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그는 말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다. 동네 주민들은 그런 점을 악용(악용한다는 인지도 없이), 어머니를 강간한다. 그럴 때면 예외 없이 어머니는 발작을 일으키고 숨을 거둔다. 섭은 습관처럼 죽어버린 어머니를 다시 살려낸다.
비록 25분의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호산나’가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그저 기계적으로 타인을 구원하는 섭, 구원자가 자신을 살려줄 것을 염두에 두고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아버지의 친구 진 씨, 말로 설명하지 못할 뿐 어쩌면 죽고 싶을지 모르는 어머니, 이 모든 상황을 비극이라 생각하지 않는 아버지. 이들의 관계성은 관객에게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나”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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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호산나 스틸컷 |
나영길 감독은 ‘호산나’를 제작하며 “우리는 왜 살아있어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구원받아야 하는가” “어쩔 수 없는 운명은 운명으로 알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던졌다. 그 고뇌의 흔적은 ‘호산나’ 속에 비극적으로 녹아들었다.
‘호산나’는 결코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또한 그 속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화려함도, 휴먼 드라마 장르의 따뜻함도, 액션 영화의 스피디함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번은 스스로에게 던져야할 질문이 담겼다. ‘호산나’에 대해 ‘적나라하고 불편한 장면이 담긴 예술 영화’ 정도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이 던지는 물음에 답하려 애쓰다보면 삶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정예인 기자 yein6120@mkculture.com/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